보조금 좀 받자고 설비 공개에 초과이익 공유까지?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요즘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둘러싸고 시끌시끌합니다.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520억 달러를 지원해주는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만든 것도 놀라웠는데, 최근 공개된 세부 조건을 보니 기업 입장에서 독소조항이 한둘이 아닌 겁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미국에 반도체 제조 공장을 만든다고 한들, 생산성이 뛰어나긴 할까요. 공장만 짓고 별 효용이 없게 되는 거 아닐까요.
세계 최강국 미국이 돈을 쏟아부으며 산업을 육성한다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냐고요? 미국이 ‘제조업 부활’ 산업정책에서 성공한 전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그런 걸 잘하는 나라가 아닌 거죠. 과연 미국의 ‘반도체 문샷(Moonshot)’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딥다이브가 들여다 보겠습니다.
미국이 인간을 달에 보내는 데 성공했던 것처럼, 첨단 반도체 제조업도 부활시킬 수 있을까? 게티이미지
미국의 제조업은 이렇게 망했다
컬러TV와 태양광 그리고 반도체. 미국에서 탄생시킨 기술이지만 지금은 생산 주도권을 해외(주로 동아시아 국가)에 빼앗겨 버리고만 대표적인 제품들입니다. 모두 비슷한 경로를 밟았죠. 훨씬 낮은 생산비용과 정부 지원으로 무장한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고, 기술격차까지 줄어들면서 미국 기업들이 밀려나게 된 겁니다.
TV와 반도체 산업은 1970~80년대 일본 전자 기업들이 무섭게 추격하면서 따라잡혔죠. 그리고 이후 TV는 다시 한국, 반도체는 대만과 한국 기업의 제조기반이 넘어갑니다. 태양광 시장은 2000년대 들어 중국에 잡아먹혔고요.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미국에서 없었던 건 아닙니다. 미국 TV제조업체 제니스(Zenith)는 1986년 도시바와 마츠시타를 포함한 21개 일본 가전회사를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가격 담합으로 미국 TV 제조사에 피해를 입혔다는 주장이었는데요. 미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담합 조사, 법무부의 소송 제기)해줬죠. 그리고 일본 기업들이 보상금을 지불하면서 잠깐 미국이 승리하는 듯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미국의 마지막 TV 제조업체였던 제니스는 결국 파산해 1999년 LG에 인수됐습니다.
1918년 설립된 제니스는 최초로 무선 TV 리모콘을 출시하는(1955년) 등 한때 업계의 선도 기업이었다.
지금은 LG전자의 100% 자회사로, 디지털TV 관련 기술 라이선스를 판매한다. 제니스 홈페이지
폴리티코는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외국 경쟁자들이 때로는 보조금과 담합을 통해 미국을 이겼기 때문에 민주당과 공화당 행정부는 이러한 문제와 씨름해 왔습니다. 결론은 미국산이었던 산업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종종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반도체의 경우도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반도체 업체였던 인텔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치킨게임으로 벼랑 끝에 섭니다. 1985년 초 30달러였던 256KB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몇 달 만에 10분의 1인 3달러로 추락한 거죠. 인텔은 1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고 부도 위기까지 놓입니다.
이런 인텔을 구한 건 앤드류 그로브 전 CEO(1987년~1998년 재임)였는데요. 그는 아직 수익이 나긴 하지만(버리긴 너무 아깝지만) 쇠퇴할 수밖에 없는 주력 사업인 메모리 반도체를 버리고(공장 폐쇄와 8000명 해고) 대신 신사업인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하도록 사업을 완전히 재편합니다. 그리고 마치 신병훈련소처럼 엄격한 규율(매일 2시간 이상 초과근무, 음악과 잡담 금지 등)로 제조능력을 끌어올렸죠. 미국이 CPU 생산공장을 여전히 보유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부도 위기에 처했던 인텔은 주력 사업이던 메모리 반도체를 버리고 CPU 시장에 뛰어들며 새롭게 도약하게 됐다. 하지만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최근(2020년)까지도 인텔에 “제조 경쟁력이 없으니 자체 팹(생산공장)을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제조는 외부에 맡기고 설계에만 집중하는 게 돈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인텔 홈페이지
제조업은 창의적이지 않다고?
첨단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가 40년 가까이 되는데, 왜 미국 정부는 이제서야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며 대대적으로 나선 걸까요. 그동안은 왜 이런 움직임이 크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탈세계화와 미중 패권 경쟁을 포함한 아주 긴 해설 기사가 필요하겠지만, 간략하게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 볼게요.
우선 하나는 미국의 의사 결정권자들이 정부 주도 산업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고요? 냉전 시절 보수파는 ‘소련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싫어했고요. 그 외 많은 사람들도 ‘시장이 아닌 정부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것’이라며 부정적이었습니다. 산업정책이 과연 실제로 산업을 육성하는 효과가 있느냐(괜히 돈만 쓰는 것 아니냐)에 대한 의문도 컸고요. 예컨대 오바마 행정부가 태양광 패널시장의 경쟁력을 되살리겠다며 5억3500만 달러의 대출 보증을 서줬지만 결국 2년 만에 파산했던 태양광 패널 제조업체 ‘솔린드라 코퍼레이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특혜 의혹 등 많은 논란만 남김).
‘미국 기업이란 무엇인가’도 산업정책을 둘러싼 논란거리였는데요. ‘미국에 본사를 두지 않은 해외 기업도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지원을 해주는 게 맞나?’를 두고 의견이 제각각이었던 겁니다 (물론 지금은 그 답이 ‘당연히 Yes’로 정리됨).
미국의 제조업이 쇠퇴한 데는 제조업에 대한 저평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선 ‘제조가 없이는 혁신도 없다(진짜 혁신은 제조에서 나온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사진은 TSMC 공장 내부 모습. TSMC 홈페이지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의 비제조업이 워낙 잘 나간 것도 제조업 일자리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빅테크나 투자은행(IB)처럼 공장이 없어도 막대한 돈을 버는(=고임금을 주는) 미국 기업이 엄청나게 커진 거죠. 반도체 산업에서도 ‘설계’ 같은 고부가가치 분야로만 고급인력이 쏠렸고요.
다시 말해 ‘제조업=급여와 수익성이 낮고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일’, ‘테크 기업=급여와 수익성이 높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로 여기는 분위기가 꽤 오랫동안 자리잡은 건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2010년 4월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구제금융 말고 스타트업’)의 한토막을 보시면 이런 선입견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보수가 좋은 일자리는 구제금융(구제금융 받는 제조업 중심 대기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스타트업에서 나왔습니다. 스타트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똑똑하고 창의적이며 영감을 받은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2001년 7월 8일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있는 기술 혁신 박물관에서 인텔 회장 앤디 그로브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겸 수석 소프트웨어 설계자 빌 게이츠(오른쪽)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
물론 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앤드류 그로브 전 인텔 CEO가 2010년 블룸버그에 쓴 기고문을 보면 13년 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제를 아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는 배터리 산업을 예로 들며 “우리는 마침내 대량생산 전기차를 목격하게 될 것인데, 미국은 30년 전 가전제품 제조를 중단하면서 배터리 분야에서 선두를 잃었다”면서 “일자리를 내보낸 것뿐 아니라 일부 기술은 확장과 혁신이 모두 해외에서 발생한다는 게 더 큰 위험”이라고 지적합니다. “제조업을 포기하면 미국은 미래 신흥 산업에 진입하지 못할 수 있다”면서 미국 경제의 변화를 촉구했는데요. 물론 당시 실리콘밸리에선 한물 간 꼰대의 잔소리쯤으로 들렸을 겁니다.
520억 달러? 턱도 없다!
세계 질서가 달라졌고 이제 미국은 여야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제조업에 살길이 있다고 외칩니다. 중국에 경제적 패권을 빼길 수 있다는 공포심이 자극한 변화인데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반도체 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이렇게 말했죠. “수십 년 동안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제조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조업 일자리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첨단 제조업 일자리가 잘 돌아오고 있는 게 맞을까요? 미국 정부의 야심찬 목표가 과연 성공할지에 대한 회의론이 만만찮은데요.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겁니다. ‘미국은 이미 제조업 경쟁력을 잃었고 그걸 다시 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그런 사례도 없다).’
모리스 창 TSMC 설립자. 오랫동안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 활동해온 그는 1987년 다른 기업에서 위탁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만 전문으로 하는 TSMC를 대만에 설립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새 지평을 열었다. TSMC 홈페이지
이와 관련해 가장 신뢰할 만한(경력이나 인지도 면에서) 발언자가 있죠. 바로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경력을 가진 반도체 업계의 살아있는 신화, 대만 TSMC 설립자 모리스 창입니다. 1931년생인 모리스 창은 미국에 대한 쓴소리도 가감없이 하는 걸로 유명한데요. 2022년 4월 그는 브루킹스연구소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왜 미국의 반도체 제조업 부활이 어려운가’를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몇가지 꼽아보면요.
①미국엔 (좋은) 제조 인력이 없다
=“반도체의 강점은 거의 전적으로 사람과 관련된 겁니다. 미국은 1950, 60, 70년대엔 이런 강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재들은 더 높은 임금의 직업으로 이동했습니다. 과거 MBA 졸업생은 GE나 IBM 같은 대기업에 다녔지만 이제 그들은 월스트리트나 컨설팅 회사로 갑니다.”
②미국 생산비용은 너무 비싸다
=”TSMC 오레곤 공장의 생산비용은 같은 제품이어도 대만보다 약 50% 더 비쌉니다. 25년 동안 성능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비용 차이는 거의 똑같이 유지됐습니다.”
③520억 달러 보조금으론 턱도 없다
=“미국은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출한다고 합니다. 글쎄요, 충분하지 않을 거예요. 미국에서 반도체 제조를 늘리는 건 낭비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무익한 일입니다. 그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지 않습니다.”
모리스 창 전 회장은 지난해 8월 대만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과 만났을 때도 “미국 정부의 계획은 너무 순진하다”고 지적했다고 하죠. “미국이 많은 돈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해도 계속 추가 투자를 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지난해 12월 애리조나주 TSMC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바이든 대통령의 모습. 백악관 공식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이다.
뉴욕타임스가 얼마 전 TSMC 직원 11명을 인터뷰해 보도한 기사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전합니다. “미국 공장에 대한 TSMC 내부의 의심이 커지고 있다”는 건데요. 높은 비용(TSMC는 미국 공장 건설 비용이 대만의 최소 4배가 될 거라고 밝혔음)과 함께 인사관리의 어려움이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지난해 TSMC를 떠난 엔지니어는 이렇게 말했죠. “웨이퍼 제조에서 가장 어려운 건 기술이 아닌 인사관리입니다. 미국인은 관리하기 가장 어렵기 때문에 미국이 최악입니다.”
공장 자체야 만들긴 만들겠지만, 얼마나 사업성이 있겠느냐는 물음표라는 뜻인데요. 이와 관련해 참고로 할 만한 사례도 있습니다. 일본 파나소닉이 2017년부터 미국 네바다 기가팩토리에서 테슬라에 들어갈 배터리를 생산해왔는데요.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초기 몇 년 간 파나소닉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가장 문제는 근로자를 훈련시키고 장비에 적응시키는 일이었는데요. 파나소닉 관계자는 “미국 노동자 손이 너무 커서 아시아산 기계를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전했습니다. 배터리 산업도 이 정도인데, 정밀한 숙련도가 필요한 반도체는 더 말할 나위 없겠죠.
지난달 조지타운대에서 반도체 지원법에 대해 연설하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그는 케네디 정부의 문샷 프로젝트를 예로 들며 반도체 관련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무부 홈페이지
물론 이를 미국 정부가 모르진 않습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얼마전 조지타운대 연설에서 “우리의 야심찬 목표 달성을 위해 정부 투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면서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는 최소 5000억 달러의 민간의 추가 투자, 또 다른 하나는 반도체 관련 대학 졸업생 수를 10년 동안 3배로 늘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목표인데요. 그는 “케네디가 인간을 달에 보내는 임무를 발표한 후 10년 동안 물리학 박사의 수는 3배, 공학 박사의 수는 4배가 되었다”며 반도체 제조업 부활을 ‘문샷(Moonshot) 프로젝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만만찮은 일이라는 뜻이겠죠.
그래서 결론은?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을 포함한 반도체 제조업 부활 계획은 아직 막 첫발을 뗀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은 이 경쟁에서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고요. 과연 미국은 30년 넘게 잃은 첨단 반도체 제조업의 기반을 일부라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상황에서 헛돈만 쓰고 말게 될까요. 미국 일이긴 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미래 걸린 문제이다 보니 신경이 쓰입니다. By.딥다이브
왜 미국은 첨단 제조업 경쟁력을 잃었는지, 그걸 다시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지를 정리해봤는데요. 워낙 긴 히스토리라서 많은 이야기를 다 담지는 못했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미국은 지난 40년 간 첨단 제조업에서 밀려났습니다. 이를 다시 되살리려는 산업정책은 시도도 하기 전에 비판에 부딪히거나 금세 좌절됐습니다.
금융과 빅테크 같은 산업이 미국에서 급부상한 것도 제조업의 위축을 가속화했습니다. ‘제조업 말고 돈 되는 스타트업을 키우자’는 논리가 대세를 이뤘습니다.
뒤늦게 미국 정부가 520억 달러를 들여 반도체 제조업을 부활시키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이란 회의론이 만만찮죠. 부족한 인력과 과도한 비용, 낮은 생산성 등등. 허들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5000억 달러의 추가 민간 투자+반도체 인력 3배 양성’으로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인데요. 아직은 말뿐인 단계. 과연 유례 없는 첨단 제조업의 부활은 가능하긴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