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기자의 눈으로 본 빈살만
사우디서 그의 말은 곧 율법
여가수 공연 등 관습 깼지만
왕족 구금·카슈끄지 암살 의혹
"자유 신장? 그가 준 만큼만 돼"
공손하고 푸근한 미소를 가진 한 아랍 남성의 전설적인 등장 장면에서 이 위험한 책의 서문이 시작된다.
때는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더 리츠칼튼 호텔. 직원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객실을 개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팀원들은 200개 객실문 자물쇠를 제거했다. 커튼은 철거됐고 샤워룸 문이 뜯겨나갔다. 스위트룸 서너 개는 조사실로 바뀌었다. 국빈용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이 호텔로 몇 시간 만에 사우디의 잠재적 왕위 계승자, 억만장자 재벌 총수, 국가방위부·경제기획부 장관, 해군사령관 등 유력 인사들이 불려 들어왔다. 송환된 핵심 인사는 300명에 이르렀다.
빈 살만의 두 얼굴 브래들리 호프·저스틴 셱 지음 박광호 옮김, 오픈하우스 펴냄, 2만5000원
체념한 표정으로 호텔에 구금된 이들은 대개 부패·횡령 혐의를 받았다. 구금자들은 조사 끝에 수백억 달러 자산을 털렸다. 그날부터 이어진 태풍 같던 소동의 중심에는 '사우디 개혁'을 진두지휘한 무함마드 빈 살만이 있었다. 2017년 아랍 최대 강국 사우디의 왕세자로 책봉된 뒤 그는 '멀미'가 날 만한 속도로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리츠칼튼 사건은 "빈 살만이 권력의 전면으로 나오는 하나의 의식(儀式)이었다"고 이 책은 기록한다.
신간 '빈 살만의 두 얼굴'(원제 Blood and Oil)은 아랍을 넘어 세계 최고 권력으로 부상한 빈 살만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명암을 공히 다룬 책이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던 두 명의 월스트리트저널 기자가 집필한 '빈 살만 입문서'라고 은유할 만하다. 1985년 8월 31일 리야드 태생. 키 182㎝에 건장한 호남형 얼굴. 국왕 살만 빈 압둘아지즈의 총애 받는 아들. 추정 자산은 무려 2700조원. 별명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남자'란 뜻의 '미스터 에브리싱'.
하지만 그의 10대 시절은 또래처럼 평범했다. 유년 시절 빈 살만은 맥도널드를 좋아해 비만했다. 그가 10대일 때 리야드 주지사였던 아버지 살만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처럼 군대를 만들어 적을 정복하는 게임을 즐기는 아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한번은 근처 슈퍼마켓에서 군복을 입고 난장판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빈 살만이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건 만 26세이던 2011년이었다. 부친이 국방장관에 취임하며 빈 살만은 장관 특별보좌관이 됐다. 2013년 아버지가 왕세제로 올라서며 빈 살만은 왕세제 궁정실장이 됐다. 아버지가 결국 2015년 국왕에 취임하자 빈 살만은 왕세자가 된 사촌 형 빈 나예프에 이어 부왕세자로 책봉된다. 빈 나예프가 2017년 해임되며 빈 살만은 왕세자로 부상한다.
빈 살만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 2년간 착실하게 개혁가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왕세자가 되자 실질 권한은 더 커졌고, 젊은 왕세자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빈 살만은 쿠란만 중심에 두는 와하브주의를 혁파했다. 그는 보수적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일갈했다. "고정불변의 사상이나 오류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적 판단은 시간, 공간, 시민정신에 근거해 내려져야 한다." 빈 살만은 율법의 가변성을 강조한 왕조 최초의 인물로 기록됐다.
사우디 여성의 권익도 그의 언행 한마디로 전환점을 맞았다. 여성 가수의 대중 공연이 허용됐고, 제다 스타디움엔 여성 관중 입장이 허락됐다. 미혼 남녀 교제, 남성 후견인의 허락 없는 21세 이상 여성의 해외여행 허가, 여성 사업체 운영 허가, 여성 사우디증권거래소장 최초 임명, 여성 주미대사 최초 임명 등 사우디 사회는 전에 없던 모습으로 급변했다.
개혁의 이면에서 책은 개혁 반대파에 관한 억압, 사우디가 직접 개입했다고 강하게 의심받는 자말 카슈끄지 암살을 둘러싸고 '개혁가 빈 살만'을 보는 세인의 호평을 역류시킨다.
부패를 척결하려 노력하고 나라를 관광객에게 개방한 빈 살만은, 그러나 자신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을 끌고 가서 정부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2030년 완공을 앞둔 직선 170㎞ 신도시 네옴시티 프로젝트, 한 변의 길이가 400m에 달하는 거대 큐브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20개가 들어가는 무카프 프로젝트 등으로 그의 사업가 기질은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그 안에 도사린 대전제는 이거였다. "당신들은 빈 살만이 결정한 범위 안에서만 자유롭다."
책은 특히 주튀르키예 사우디 대사관에서 벌어진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통해 빈 살만의 어두운 민낯을 상기시킨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제이크 설리번 안보보좌관이 카슈끄지 문제를 면전에서 거론하자 빈 살만이 고함을 지르며 미팅을 끝내버렸다는 내용도 책은 자세히 담았다. 책은 말한다. "빈 살만의 견해는 이진법이어서 카슈끄지는 친구가 아니면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