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문제로 과거엔 스타트업 불모지… 최근 가장 핫한 투자처로
미국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털(VC) 세쿼이아는 지난 15일(현지 시각) 미국 방산 스타트업 마하 인더스트리스에 570만달러(약 74억원)를 투자했다. 구글, 링크드인, 엔비디아, 유튜브 등에 투자한 50여 년 역사의 세쿼이아가 방산 테크에 투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MIT를 중퇴한 이선 손턴(19)이 지난해 창업한 마하 인더스트리스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수소 동력 무기를 개발할 계획이다. 전장에서 쓰이는 무인 항공시스템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앤듀릴 인더스트리스도 최근 세계 최대 VC인 안드레센 호로위츠 등에서 15억달러를 유치했다.
스타트업 혹한기로 불리는 글로벌 경제 침체 위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방산 테크 투자 붐이 일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VC 큰손들이 방산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이 분야에 대한 VC 투자는 333억달러로 3년 전인 2019년(160억달러)의 두 배로 늘었다. 올해 5월까지만 해도 이미 170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방산 테크 산업은 2027년까지 1847억달러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게임 체인저로
방산 테크 산업은 스타트업의 불모지였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에선 군사 기술에 대한 투자가 윤리적인 문제로 금기시돼 왔기 때문이다. 구글을 필두로 스타트업 업계에선 수익성을 이유로 윤리나 정치적올바름(PC)에 반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는 구호가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 2018년 구글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군사용 드론 프로그램을 계획했지만 직원들이 반대 성명을 내는 등 강하게 반발해 계획을 철회하기도 했다. 보안 등을 이유로 기존 업체와의 계약을 이어나가는 미국 국방부의 보수적인 성향도 스타트업엔 큰 장벽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종의 게임 체인저가 됐다. 전쟁이 위성 통신, 자율 드론 등을 활용한 첨단전의 양상을 띠면서 각종 첨단 방산 기술을 시험하는 테스트 베드가 된 것이다. 실제 일론 머스크가 소유한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와 버지니아에 기반을 둔 방산 스타트업 호크360의 기술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실리콘밸리 테크 스타트업 팔란티어의 전쟁용 데이터 분석 플랫폼 ‘고담’도 우크라이나에 전격 투입됐다. 해병대 장교 출신인 토머스 헤임스는 뉴욕타임스에 “진정한 군사 혁명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1차 세계 대전 때 두 발로 걷던 병사들이 2차 대전에선 기계화 보병으로 발전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혁명”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도 변했다
그간 민간 기업의 참여에 보수적이었던 각국 국방부도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펜타곤이 ‘방산업체 대열에 동참하라’며 실리콘밸리 첨단 스타트업에 구애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뿐만 아니라 미·중 패권 갈등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차세대 군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시에 군과 민간이 긴밀히 협력하는 중국의 방위 산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테크 스타트업에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미 국방 예산은 사상 최대인 886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FT는 “과거의 경계심은 미국의 막대한 국방 예산에서 스타트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었다”며 “대형 VC들은 방산 제품을 만드는 기업뿐 아니라 치명적인 무력을 포함한 ‘키네틱’ 무기 시스템을 개발하는 기업에도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방산 테크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만 실드AI, 호크아이360 앤듀릴, 리벨리온 디펜스, 팔란티어, 에프루스 등 6곳이다. 실드AI 창업자인 브랜든 쳉은 “2015년 사업 초창기 우리는 30명의 시드 투자자들에게 모두 ‘노(NO)’라는 대답을 들었다”며 “방산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터부시했던 VC들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갑자기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