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섭 변호사님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사실 영아살해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난했던 옛날, 아이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짐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영아살해가 있을 수 없다. 강력한 형사처벌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아이가 짐이 될 법한 상황을 '개인의 선택'으로 조절하는 게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되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된다. 아이를 낳더라도 하나만 낳지 둘 이상을 낳지 않는 방법도 있다. 물론 용이하다는 것도 말이 용이하다는 거지 20대, 30대 남녀 사이에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 따른 조절이 아주아주 쉽지 않은 일인 건 맞다. 인간이 이렇게 진화되지 않았는데, 자연을 거스르는게 쉽겠나? 어쨌든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진화고 뭐고 상황이 많이 엄중하지 않은가? 월드컵 4강이 다시 온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과학적, 합리적인 이성을 따라야만 한다. 아니... 4강 간다고 해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며칠 전 포스팅에서 이야기 했지만 나는 10년 전인 2013년 말 집을 샀다. 주식투자자는 원래 집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샀다. 그때도 당연히 집을 사는 게 쉽지는 않았다. 많이 아꼈고, 주식 투자로 돈도 좀 번 데다가, 로펌에서 받는 월급도 또래 직장인에 비해 아주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집을 사는 건 늘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ㅆㅂ 정도라는 게 있다.
만약 내(1979년생)가 10년 후에 태어나 1989년생이라는 것만 다를 뿐 모든 상황이 같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35살이고 결혼을 앞둔 6년차 변호사라면, 집을 사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아무리 아끼고, 주식으로 돈 좀 벌었고, 아무리 월급이 많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지금이라면 비슷한 수준의 집에 전세로 들어가는 것도 아득히 불가능하다. 굳이 집을 구한다면 아주 많이 눈을 낮추어 구해야 한다. 빌라나 경기도의 신도시는 가능할 것도 같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되네... 빌라를 구하면, (몇 년 오피스텔 생활하던 것에서) 다시 고시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나서 긍정적이다. 경기도 신도시에 집을 구하면, 새벽 3시까지 일하고, 1시간 걸려 집에 가서 안 씻고 바로 자면 네 시간 정도 잘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체의 한계를 실험할 수 있어 긍정적이다. 그나마도 나 혼자면 나름 이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혼을 앞 둔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다른 문제일 것 같긴 하다.
집만 빼면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월급이 적지 않으니 수입차 보유도 가능하고, 약간 사치스런 느낌의 해외여행도 가능하다. 꽤나 비싸고 맛있는 것도 크게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고, 좋은 옷도 큰 고민없이 입을 수 있다. 문화생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라떼는 빌라 어쩌구 이야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총각 변호사 시절 선배 변호사들과 수다를 떨다보면 농담반 진담반 혼테크를 권유하는 분들도 있었다. 한 3억 정도 전세금을 지원받아 강남쪽에 작은 아파트라도 얻으면 처음 생활이 자리잡히는 게 편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1989년생이었다면 혼테크도 의미없다. 1989년생 혜섭이는 슬프게도 결혼을 못했다.
나는 2013년 말에 집을 샀고, 2014년에 결혼을 했으며, 2015년에 아이가 생겼다. 아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 출생아수 추이를 보면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십 몇 년을 40만명 대에서 횡보하다가 우리 아이가 태어나던 2016년 처음으로 40만을 맞추었고, 이후로 매년 크게 급락했다. 작년엔 25만명이 안 되었고, 올해는 작년 보다도 못하다.
태어난 아이가 줄어든 시기는 집값이 수직 상승한 시기와 맞물린다. 치솟는 집값에 영끌하여 마련한 대출금 갚아야하니 당연히 둘째도 못 낳는다. 무슨 엄밀한 증명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출생아수가 줄어들었어야 맞는데, 2008년경부터 2013년경까지 집값이 횡보 내지 하락하였기에 별로 안 줄어들었다가 2013년부터 집값이 급등하면서 출생아수의 하락도 한꺼번에 온 것일 수도 있다.
나와 동갑인 1979년생은 86만명이었다. 2023년생은 22~23만명이나 될까? 60만명이면 웬만한 중간 이상급 도시 하나 규모다.
2023년생 22~23만명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노인들을 부양할 것 같지도 않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누가 감내하나? 헬조선 탈출은 지능순이라 젊은이들은 다 탈출하고 노인이 된 7080끼리 오손도손 페북에서 집값 서열놀이나 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높은 집값과 낮은 출생아수 극심한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매일매일이 황당한 자본시장, 그지 같은 기업 거버넌스는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나라가 계속 성장을 하기는 하고 자본을 축적하기는 하는데 그지 같은 거버넌스로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못하니 (축적되는 자본 중 일부는 미국주식으로 빠지긴 했지만) 남은 자본이 아파트로 아파트로 모여 이 상황을 낳았다. 주식을 하면 대주주가 다 떼어가고 나누어 주지도 않지만 아파트는 그나마 안전하였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사람이 사는 곳이기도 하기에 상승하면 부작용이 많은 자산인데, 이젠 영끌족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영끌족들이 살아야 하기에 금리도 마음대로 못 올리고 쉽게 가격을 꺼뜨릴 수도 없다. 대신 원래는 태어났어야 할, 천사같기만 한 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전설로 남을 현대판, 대한민국 버전의 영아살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