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중요한 건 한 가지, ‘정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가’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로 거론되는 프리드먼은 대표적인 자유시장 옹호론자였다.
그는 “정부는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고 몰아붙이며, 자유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대한 줄여야 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정부의 역할은 단 하나, 통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뿐이었다.
프리드먼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던 1976년 미국 정부의 재정 지출은 총 620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 의회 예산국의 발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정부의 재정 지출은 총 6조2000억 달러 수준으로 예상된다. GDP의 23.7%에 달하는 수준이다.
프리드먼이 살아 돌아온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정부의 재정 지출이 늘어난 건 미국만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GDP 대비 정부 지출이 가장 높은 국가는 프랑스다. 59%를 넘어선다. 영국 48.4%, 독일 51%, 일본 44.5%에 이르며 한국 또한 38.1% 정도다.
‘큰 정부’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향이 크다. 코로나는 지나갔지만 ‘다시 돌아온 큰 정부’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이미 정부의 역할은 팬데믹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을 돌보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무너진 시장을 되살리기 위한 ‘마중물’을 붓는 것은 물론 경제 정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40년을 지배한 ‘작은 정부’의 시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6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선언했다. 당시 그는 대통령 재선을 준비 중이었고, 이 선언 또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철저히 의도된 연설이었다.자신이 무분별한 재정 확대보다는 균형 잡힌 예산을 추구하는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목표로 한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클린턴이 속해 있던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큰 정부를 지향해 왔다. 그런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작은 정부’를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공고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큰 정부’ 대 ‘작은 정부’의 논란은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돼 온 주제다. ‘큰 정부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경제학자가 케인스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고용, 이자, 통화에 관한 일반 이론’을 펴낸 그는 불황이 왔을 때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기 회복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작은 정부론’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 고전경제학파에 기반을 두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인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으로 국제분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인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작은 정부’의 핵심은 단순 명료하다. 정부 규모를 줄이되 민간의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론’은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글로벌화가 정점에 이르렀던 지난 40여 년간 자유시장 체제에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지침은 깨질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대처리즘과 미국 공화당의 레이거노믹스를 등에 업고 글로벌 경제정책의 주류 패러다임이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사회를 지배한 건 ‘큰 정부’ 모델이었다. 산업혁명의 발원지였던 영국은 경제대국으로서 눈부신 성장을 누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1940년대 ‘베버리지 보고서’ 등을 계기로 복지제도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보편화됐지만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던 영국의 경제는 급격하게 몰락했다. 과도한 복지 지출로 인한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영국병으로 나타났다.
‘규제완화, 작은 정부, 자유시장, 민영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대처리즘은 철저하게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이를 통해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영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어냈다. 레이거노믹스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등장했다. 당시 물가가 높아진 상황에서 ‘재정 확대’ 정책을 펼쳤지만 오히려 물가는 더 높아지고 경기 또한 침체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1981년 1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부인 낸시 레이건. 취임 연설에서 레이건은 정부를 "문제"라고 불렀다. 사진=연합뉴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 경제를 이끌게 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감세, 규제완화를 핵심으로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민간의 활력과 경제 생산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성공은 영국과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규제완화와 시장 자율 확대, 그리고 ‘작은 정부’라는 믿음을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굳건히 심어 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는 믿음은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강력해졌고, 그럴수록 ‘큰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부되며 힘이 약해져 갔다.
“우리는 큰 정부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 국민에게 더 작고 관료주의가 덜한 정부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국민이 그 수단 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클린턴 대통령이 ‘큰 정부의 종말’을 고하기 앞서 말한 연설의 내용이다. 당시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부가 자신의 사업에 간섭하지 않고 시장에서 번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클린턴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코로나19 사태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정부의 역할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가 다시 불러온 큰 정부
자유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위에 서 있었던 ‘작은 정부의 시대’는 그러나 이후 25년을 채 가지 못했다. 영국을 ‘유럽의 병자’로 만든 악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큰 정부’를 다시 불러들인 건 코로나라는 재난이었지만, 사실 조짐은 오래전 나타나고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긴’ 자유시장은 부의 불평등과 중산층의 몰락 등 여러 문제를 낳았고, 자본에 대한 끝없는 탐욕 위에 배를 불리다 무너지고 만 금융기관들은 결국 국가가 나서서 구제했다. 몰락한 중산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높이고, 중국은 물론 캐나다까지 새 무역협정에 끌어 앉혔다. 보호무역주의의 부활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찾아온 팬데믹은 ‘작은 정부’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팬데믹은 한순간에 의료, 보건과 같은 취약한 공공 서비스의 현실을 드러냈고,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코로나는 일시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보다 경제에 훨씬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기업들은 물론 소상공인들은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한국은 물론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각국 정부들은 과감하게 국민의 삶과 시장에 개입했다.
백신을 배포하고 무너진 공공의료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시장을 되살리는 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했다. 2021년 기준 미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투입한 금액만 해도 1조9000억 달러에 달한다. OECD의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 발생 동안 OECD 국가 평균 GDP 대비 재정 지출 비율은 2019년 GDP의 20%에서 2020년 23%까지 증가했다.
코로나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다. 지난 40여 년간 ‘시장에 개입하려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불신이 코로나를 계기로 반전을 맞은 것이다. 미국의 갤럽은 매년 9월 ‘최적의 정부 역할’과 관련한 국민 인식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2021년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4%가 ‘정부가 코로나 등으로 인한 시장의 문제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1996년 같은 질문에 대해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개인과 기업에 맡겨야 한다”는 응답이 60%에 육박했다.
갤럽은 이에 대해 “지난 30년간 갤럽의 조사 기간 중 가장 높은 수치다”며 “9·11 테러가 있었던 2001년 10월 이후 ‘정부가 더 많은 일을 하길 바란다’는 응답이 ‘정부가 일을 덜해야 한다’는 응답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고령화로 인한 연금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갈등을 빚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 이후 ‘작은 정부’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팬데믹은 지나갔지만 각국 정부의 재정 지출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세계 석학들 또한 ‘큰 정부의 귀환’을 얘기하며 향후에도 정부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코로나 이후 정부 지출의 확대는 주로 국방과 고령화, 기후변화의 세 가지 영역에 집중돼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된 이후 2021년 말까지 31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중 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한다는 목표를 달성한 국가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각국 정부의 안보 관련 지출의 증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 4월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2년 기준 세계 국방비 지출액을 사상 최대인 2조2400억 달러(약 3000조원) 정도로 추산한 바 있다. 2021년 대비 3.7% 증가한 수치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대립했던 ‘냉전 시대’를 압도하는 금액이다.
특히 이 조사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2022년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감안하면, 각국의 국방 관련 지출 비용은 향후 더욱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이스라엘 경제지 칼칼리스트는 이스라엘 정부의 이번 전쟁 비용이 510억 달러(약 66조4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스라엘 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2022년 기준 8770억 달러(약 1171조원)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스라엘 전쟁까지 동시에 지원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국방비 지출과 관련한 재정 압박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현재 국가 부채만 34조 달러에 육박한다. 2023년 미국 GDP 추정치인 25조8960억 달러의 131%에 달하는 수치다. 중동 전쟁까지 장기화될 경우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 미 정부가 채무불이행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어 더욱 답답한 상황이다. 러시아와 중국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까지 군사안보와 관련한 지출을 늘리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또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관련 지출을 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2022년 국방비는 8640억 달러로 2021년 대비 약 9.2% 증가했다. 러시아 GDP의 4.1% 수준에 달한다. 러시아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을 계기로 해마다 국방비 지출을 늘려온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2022년 기준 2930억 달러로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지출했다.
유럽 국가들도 안보와 관련한 지출을 크게 늘리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 시작 3일 만에 2024년까지 GDP 2%의 국방비 지출 목표를 달성할 것을 약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재무장에 나선 상황이다. 독일은 올해만 107억 달러의 추가 특별기금을 투입해 군 현대화와 함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핀란드(2021년 대비 36% 증가), 리투아니아(27%), 스웨덴(12%), 폴란드(11%)의 국방비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인도 또한 2020년 국경에서 발생한 중국과의 폭력 충돌 이후 군 현대화를 추구하며 2021년 대비 2022년 국방비 지출이 무려 6%가량 증가했다. 일본은 올해 국방 예산을 57%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증세를 추진하면서 국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령화로 인한 의료 및 연금 지출 또한 향후 급격히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OECD 분석에 따르면, OECD 국가 평균 노년부양비(20~26세 대비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2023년 33%에서 2027년 36%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후 1%포인트씩 증가하며 2050년에는 52%에 이를 것이라는 계산이다.
고령화는 의료 및 연금 지출의 증가만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로 인해 경제적 활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경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정부의 경제 정책 등을 감안한다면 국가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25년부터 2065년 사이 연금, 의료, 성인 사회 복지 등 고령 관련 지출이 GDP의 1.5%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각국 정부에 강력한 재정 압박을 줄 수 있는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연금 개혁’이 필수다. 이미 프랑스 등의 국가는 연금 개혁 문제로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있으며, 이는 한국을 포함해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다른 국가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홍수, 가뭄, 산불 등 재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에너지 전환이라는 과제 또한 시급하다. 문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국가의 기반이 되고 있는 에너지 시스템 자체에 대한 혁신과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친환경 기술 개발과 유치는 각 국가의 안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추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0년 이후 각국 정부가 클린에너지에 쏟아부은 지원금만 해도 1조3400억 달러에 달한다.
특히 호주, 브라질, 캐나다, EU, 일본 등의 국가에서는 여기에 더해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추가 정책 패키지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전 세계 국가들의 국방비 관련 지출이 급증하는 추세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시장을 움직이는 ‘보이는 손’의 힘
‘다시 찾아온 큰 정부의 시대: 경제 정책의 룰을 다시 쓰고 있는 바이든’ 지난 7월 파이낸셜타임스에 게재된 기사의 제목이다. 이 기사는 미국 버펄로 지역의 한 산업현장으로부터 시작한다.
한때 ‘러스트벨트의 쇠퇴’를 상징했던 이 지역이 최근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지역 한 공장에서는 리튬이온전지를 활용해 사무실, 병원 등에 백업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배터리를 제작하는 스타트업이 자리 잡고 수많은 투자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 지역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의 공격적인 지원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칩스법(반도체칩과 과학법), 그리고 2021년 말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이 통과된 영향이 컸다.
이들 법안의 골자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의 보조금 및 대출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미 전역에서 황폐화된 산업 지역을 일으키기 위해 강력한 정책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 같은 정책이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미국 내 공장 건설을 약속하고 나선 것 또한 ‘정부가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미국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심화되면서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독일은 에너지 회사인 유니퍼를 ‘국유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유니퍼의 지분 99%를 인수하는 데 약 290억 유로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독일 내 러시아 천연가스 최대 수입업체인 유니퍼를 국유화함으로써 천연가스 공급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로레르트 하베크 경제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유럽 국가들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고 있다. 브뤼셀에 위치한 브루겔 싱크탱크는 27개 EU 국가들과 영국이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출한 금액은 약 4840억 달러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EU 국가들 GDP의 2.5%에 달하는 금액이다.
JP모간은 지난해 에너지 위기 등에도 불구하고 유럽 경제가 비교적 선방한 이유 중 하나로 ‘큰 정부의 역할’을 꼽기도 했다. 유로존 경제는 지난해 9월까지 3개월 동안 연율 0.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가 급등에 취약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군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국가 개입을 통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외에도 EU는 2022년 2월 팬데믹 이후 유럽 국가들의 경제 회복을 지원하기 위한 ‘포스트 코로나 패키지’를 선보였다. 에너지 전환을 위한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서부터 기후변화 완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이 패키지에는 8070억 유로 상당의 투자가 계획돼 있다.
일본은 지난해 4월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며 에너지 및 식료품 비용 상승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가계에 대한 현금 지급을 승인한 것은 물론 기업에도 막대한 지원금을 제공했다. 인도는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8억 명의 시민에게 정기적으로 쌀이나 밀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인도 정부는 여기에만 인도 연간 예산의 9%에 해당하는 약 440억 달러의 비용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슈로더의 키스 웨이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케인스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현재 미국, 유럽, 일본 등 각국 정부는 193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경제에 개입하고 있다”며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며 이로 인한 소비자와 기업의 타격을 완화하는 것은 물론, 미·중 갈등을 비롯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위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주력 산업군을 지원하는 것까지 현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의 정책을 통해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사진=AFP·연합뉴스
갈수록 커지는 정부부채 압박…결국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
정부의 역할이 커질수록 필연적인 문제가 뒤따라온다. 다름 아닌 정부부채다. 사상 처음으로 33조 달러를 넘어선 미국의 정부부채를 포함해 이미 각국 정부부채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막대한 규모에 이르렀다.
미 중앙은행(Fed)의 하계 휴양 포럼인 잭슨홀 포럼은 ‘통화정책의 다보스 포럼’으로 불린다. 향후 미국의 통화정책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지난 8월 잭슨홀 포럼에서는 ‘정부부채’에 대한 얘기들이 더욱 뜨겁게 오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글로벌 부채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한 결과 전 세계 국가들의 총 정부부채 규모가 2023년 8월 기준 367조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2022년 8월과 비교해 3120억 달러 증가한 규모다. IMF는 “공공 및 민간 부문이 2022년 세계 경제 생산량 총액보다 2.4배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부채와 관련한 부담이 커질수록 ‘증세’ 문제 또한 대두되고 있다. 정부가 점점 더 시장의 많은 영역에 개입할수록 지불해야 할 비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이미 부채가 많은 국가들의 경우 채권 시장을 통해 추가 지출을 조달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새로운 수입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국민과 기업들에 ‘왜 증세가 필요한지’를 설득해야 하지만, 문제는 이미 기업과 개인들은 충분한 세금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각국 정부가 사회 안전망과 의료시스템을 확충함에 따라 회원국의 GDP 대비 평균 조세부담률은 1965년 24.9%에서 2021년 평균은 34.1%까지 증가한 상황이다. ‘큰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조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1872년 영국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만화. 소득세로 인해 영국 국민이 수입을 빼앗기는 모습을 그렸다. 생활비가 오르고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증세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Print Collector/Getty Images
주디스 프리드먼 옥스퍼드대 세법 및 정책 명예교수는 “더 이상 문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것이냐’가 아니라 ‘정부가 어떻게 시장에 개입할 것이냐’이다”며 “전반적인 재정정책은 물론 세금 제도와 관련해서도 땜질식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주장했다.
웨이드 슈로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재정정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거시경제 정책이 더욱 정치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며 “중앙은행이 금융 안정성을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제한된 방법에 의존하는 것과 비교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재정정책’은 누구에게 무엇을 과세하고 어디에 지출할 것인지와 같은 선택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돌아온 ‘큰 정부’의 시대, 누구를 위해 어디에 먼저 투자를 하고 돈을 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