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투자자 워런 버핏의 단짝이자 사업 파트너인 찰리 멍거(오른쪽)가 28일(현지 시각) 9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오마하의 현인’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사업 파트너이자 단짝인 찰리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이 향년 99세로 28일(현지 시각) 별세했다고 회사 측이 이날 밝혔다. 멍거는 항상 그림자처럼 버핏의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였다. 버핏이 평소 “말은 찰리가 하고 나는 입을 벙긋댈 뿐”이라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대단했다.
멍거는 1924년 1월 미국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멍거는 어린 시절 워런 버핏의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식료품점에서 토요일마다 일했는데 당시엔 버핏과 서로 알지 못했다고 한다. 미시간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던 중 입대를 했고, 이후 캘리포니아 공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공부했다. 멍거는 부동산 변호사로 일을 하던 35살 때 지인 소개로 버핏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 다른 사람이 대화에 낄 틈도 없이 서로의 투자 관점에 매료됐다고 한다. 1965년 41살이던 멍거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전문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고, 1976년 버크셔 해서웨이에 본격 합류해 1979년 부회장을 맡았다.
워런 버핏은 평소 그를 ‘가치 투자’의 창시자로 묘사했다고 한다. ‘가치 투자’란 가치 있는 주식을 발굴해 장기적으로 보유하라는 말이다. 버핏은 “멍거는 훌륭한 기업을 공정한 가격에 사야 한다고 늘 말했다”고 했다. 특히 멍거는 버핏에게 ‘다른 투자자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크고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탄탄한 브랜드 회사를 사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버핏은 “그는 건축가였고 나는 종합 건설업자였다”고 했다.
버크셔해서웨이의 부회장이었던 찰리 멍거는 워런 버핏만큼 대중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내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로이터
버핏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다면 멍거는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버크셔에서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멍거는 평소 대화를 할 때 고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 과학자 아인슈타인, 작가 마크 트웨인, 공자 등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 그의 말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격언처럼 알려지면서, 멍거의 이름을 따 ‘멍게리즘(Mungerisms)’이라고 불렸다. “시기는 정말 어리석은 죄다. 왜냐면 그것은 결코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유일한 죄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정신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정신 중 하나다. 매우 드물기 때문에 강력하다” 등이 현재까지 그가 남긴 명언으로 통한다. 평생 모은 재산도 꽤 많다. 경제지 포브스는 올해 그의 재산을 26억달러(3조3670억원)이라고 전한 바 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족 보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버핏과 멍거는 매일 몇 시간씩 전화 통화를 할 정도였다. 버핏은 고향인 오마하에, 멍거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람은 한번도 논쟁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면 멍거는 “워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신도 내 말에 동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똑똑하지만 제가 옳거든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멍거는 버핏에게 투자 뿐만 아니라 회사 운영 측면에서도 조언을 했다. 특히 회사의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신뢰가 우선이고 능력은 둘째’라고 했다고 한다.
멍거는 나이가 들면서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 낸시도 2010년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2016년 한 지인이 “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두 번째 아내(낸시)의 첫 번째 남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그보다 조금 덜 끔찍한 남편이었을 뿐인데 60여년 동안 이 훌륭한 여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