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발표된 소설 ‘해저 2만리’ 속 노틸러스호를 아시나요. 전 세계 해저를 탐험하는 이 잠수함에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나트륨(Na) 배터리였죠. 바닷물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원소인 나트륨으로 전기를 만들어낸다는 SF적 상상이 150여 년 지나 현실이 되었습니다.
중국 CATL부터 스웨덴 노스볼트까지.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사들이 속속 나트륨이온배터리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미 표준 전쟁이 치열한 리튬이온배터리 업계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인데요. ‘그게 되겠어?’라고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기엔 기술 개발 속도가 꽤 빠릅니다. 배터리 시장 ‘게임체인저’를 꿈꾸는 나트륨이온배터리를 들여다봅니다.
나트륨 배터리? 소금으로 배터리를 만든다고? 게티이미지
잇따른 ‘나트륨배터리’ 출사표
노스볼트(Northvolt)는 스웨덴의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 스타트업입니다. ‘유럽 대륙에서 배터리를 생산하는 최초의 유럽 기업’이죠. 지난해 말 전기차용 리튬이온전지 생산을 시작했지만, 한국이나 중국 경쟁사와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 노스볼트가 며칠 전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끄는 발표를 했습니다. 나트륨이온배터리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노스볼트가 밝힌 자체 개발 나트륨이온배터리의 에너지밀도는 ㎏당 160와트시(Wh). 중저가 전기차에 들어가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180~200Wh/㎏)에 근접한 수준이죠(한국 배터리 3사의 주력인 삼원계 배터리는 240~300Wh/㎏). 노스볼트는 내년에 시제품을 내놓겠다고 했는데요. 이 회사 피터 칼슨 CEO는 이 신기술이 10년 안에 노스볼트의 “현재 포트폴리오(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했습니다.
노스볼트가 나트륨이온배터리를 자체 개발했다며 공개한 이미지. 노스볼트
사실 노스볼트보다 먼저 나트륨이온배터리 시장에 뛰어든 제조사는 수십 곳에 달합니다. 대표적인 곳을 꼽자면 중국 BYD(비야디)와 하이나(HiNa)배터리(中科海鈉), 영국 파라디온(Faradion, 인도 릴라이언스그룹이 인수), 미국 나트론에너지 등이 있죠. 중국에서만 34개 나트륨이온배터리 공장이 건설 중이거나 건설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 선두주자는 단연 CATL(닝더스다이)입니다.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사이자,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의 강자인 바로 그 CATL 말입니다.
2021년 여름 CATL의 1세대 나트륨이온배터리(160Wh/㎏) 깜짝 공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실험실에서나 연구되다가 잊힌 기술인 줄 알았던 나트륨이온배터리를 상용화해 전기차에 장착하겠다고 선언했으니까요. CATL은 이보다 월등한 성능의 2세대 제품(200Wh/㎏)을 현재 개발 중인데요. 올해 안에 중국 체리자동차가 CATL의 나트륨이온배터리가 장착된 새 전기차 ‘아이카(iCar)’를 출시할 거란 소식도 예고돼있습니다. 과연 진짜 연말까지 나올지, 나온다면 어떤 스펙과 가격일지가 궁금한데요.
중국에선 이미 전기오토바이용 나트륨배터리가 온라인쇼핑몰 타오바오에 출시돼 판매 중이라고 합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이 제품은 영하 30도 추위에도 성능이 끄떡없다고 광고 중이죠. 내년엔 아마도 수십만 개의 나트륨이온배터리 이륜차가 중국 시장에 출시될 거라고 합니다.
나트륨, 싸다 싸!
나트륨 배터리, 진짜로 나왔고 더 많이 보게 될 겁니다. 게티이미지
종합하자면 리튬 대신 나트륨을 사용한 배터리가 진짜로 나옵니다. 이 신기술에 많은 기업이 열광하고 있고요. 상당한 투자가 이미 이뤄지고 있죠. 그럼 알아봐야겠죠. 도대체 뭐가 그리 좋길래?
일단 쌉니다. 리튬이온전지보다 소재값이 훨씬 덜 들죠. 현재 원자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비교해볼까요. 탄산리튬 가격이 급락했다고 하지만(1년 전보다 –77%) 여전히 톤(t)당 13만 위안(약 2400만원). 탄산나트륨은 그 76분의 1 수준인 t당 1700위안(약 31만원)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나트륨이온배터리는 음극에 동박(구리) 대신 알루미늄박을 쓸 수 있죠. 알루미늄은 구리 가격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이 때문에 대량생산만 된다면 LFP(리튬인산철)배터리보다 원자재 비용을 30~40% 낮출 수 있을 겁니다.
소재를 구하기도 쉽습니다. 일단 나트륨은 리튬보다 지각에 훨씬 많이 매장돼있죠(나트륨은 지각의 2.7%, 리튬은 0.0065% 차지). 육지가 아닌 바닷물에서도 구할 수 있고요. 호주나 칠레 등 일부 국가에 매장량이 집중된 리튬과는 다른 점입니다.
또 추위에 강합니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온도가 낮으면 에너지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게 단점이죠. LFP배터리는 영하 20도일 땐 주행거리가 50~70%로 뚝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CATL에 따르면 나트륨이온배터리는 영하 20도 이하 추위에서도 90% 이상 성능을 발휘합니다. 안정성 높은 나트륨의 특성 때문이죠.
리튬이온배터리와 생산공정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건 제조사 입장에선 큰 장점입니다. 소재는 대부분 바뀌지만(아래 표 참조) 제조 기술 자체엔 크게 차이가 없죠. 아마도 생산라인을 싹 다 바꿀 필요 없이 기술 일부만 교체하면 제조가 가능할 거라고 합니다.
분리막 빼고 소재 다 바꿔?
아니, 나트륨이온배터리에선 리튬은 물론 대부분 소재(분리막과 양극기판 제외)가 싹 다 바뀐다고? 배터리 소재 관련 기업에 투자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신경 거슬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데요.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나트륨이온배터리가 성공한다면 리튬 수요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업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셀을 추구함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배터리) 산업에서 금속 사용량을 예측하는 시도의 위험성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걱정 수위를 조절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적어도 나트륨이온배터리가 리튬이온배터리를 완전히 대체할 거라는 전망은 아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나트륨 이온은 분명 눈여겨볼 도전자입니다. 하지만 1991년 소니가 리튬이온배터리를 처음 상용화한 이래, 리튬이 시장의 지배자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죠. 바로 작기 때문입니다.
원자번호 3번의 리튬은 현존하는 가장 가벼운 금속입니다. 스마트폰부터 전기차까지, 모든 전자장치가 원하는 건 작고 가벼운 배터리이죠. 그 점에 있어서는 리튬을 이길 소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트륨은 리튬과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는 알칼리 금속(반응성 강함)이지만, 원자번호 11번으로 크고 무겁습니다. 이 때문에 단위당 에너지 밀도가 리튬이 더 높고, 나트륨이 낮습니다. 같은 부피 또는 무게에 담을 수 있는 에너지 양에서 나트륨이 불리하죠.
달리 말하면 비슷한 무게·부피라면 나트륨이온배터리 장착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더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성능이 떨어지는 거죠. 만약 CATL이 개발 중이라는 200Wh/㎏급 2세대 나트륨이온배터리가 실제로 나온다면, 그땐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나트륨은 리튬보다 더 크고 무겁다는 단점이 뚜렷하다. 게티이미지
물론 모든 전기차가 한번 충전에 500㎞씩 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히 괜찮은 용량이면 충분한 차량도 있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전망하기로는 리튬이온배터리와 나트륨이온배터리은 공존할 겁니다. 일단은 그리 큰 에너지 용량이 필요 없는 전기 자전거와 이륜차, 저속 전기차(카트)에 나트륨이온배터리가 먼저 쓰이겠죠. 같은 이유로 내연기관 차량에 들어가는 납축전지도 나트륨이온배터리로 바뀔 가능성이 큽니다. 납축전지는 안정성과 저렴한 가격 덕분에 시장이 죽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추세인데요. 납과 황을 쓰기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키죠. 중국의 신쳉 컨설팅은 “미래엔 나트륨이온배터리가 납축전지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태양광·풍력발전으로 만든 전기를 저장해두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역시 주요 사용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SS는 어차피 움직일 필요 없으니 좀 무겁고 커도 상관없으니까요.
소형 전기차에도 나트륨이온배터리가 쓰이겠지만, 초반엔 ‘하이브리드’ 형태로 들어갈 겁니다. 즉, 나트륨과 리튬이온전지 둘을 섞어서 한 차량에 쓰는 형태이죠. CATL이 ‘AB배터리’라고 이름 붙인 방식인데요. 가성비와 주행 성능, 둘 다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BYD 역시 이런 하이브리드 방식을 소형차 모델 ‘씨걸(Sesgull)’에 적용할 예정입니다.
CATL이 2021년 7월 공개했던 나트륨이온배터리(회색)와 리튬이온배터리(파란색)를 섞어쓰는 ‘AB배터리’ 방식 소개 화면. 리튬이온전지만 쓰는 것보다 가성비가 좋을 뿐 아니라,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에서도 더 양호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CATL 설명이다. CATL
리튬가격이 발목 잡을까
그럼 나트륨이온배터리가 판을 뒤엎지는 못하더라도 그 앞날엔 비교적 희망이 가득한 걸까요. 글쎄요. 관건은 원자재 가격입니다. 과연 리튬가격이 어디까지 더 떨어지느냐에 사실상 모든 게 달려있달까요.
최근 3년 동안의 배터리용 탄산리튬 가격 추이. 현재 가격은 t당 13만500위안으로, 1년 전보다 77% 하락했다. 트레이딩 이코노믹스
1980년대부터 연구됐던 나트륨배터리가 최근 2년 사이 기업의 주목 받은 건 사실 요동치는 리튬가격 때문이죠. 2020년 말 t당 3만 위안대였던 탄산리튬 가격은 한동안 정말 무섭게 치솟았습니다. 지난해 11월엔 59만 위안을 넘어서기까지 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놀라운 속도로 리튬 가격이 폭락 중입니다. 전기차 수요가 예상보다 부진하면서 리튬 공급이 과잉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이제 글로벌 리튬시장의 공급과잉이 2028년까지 이어질 것(벤치마크 미네랄 인텔리전스)이란 리튬 비관론마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트륨이온배터리는 이제 막 산업화의 초기에 있습니다. 전기차에 장착해도 될 수준으로 에너지 밀도를 끌어올리려면 갈 길이 먼데요. 리튬가격이 예상과 달리 급락한다면 기업들의 나트륨배터리 개발 의지가 꺾일지 모릅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충분한 새로운 리튬 광산이 생성된다면(리튬 공급이 충분하다면) 나트륨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를 높이기 위해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급여를 지급할 인센티브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보죠. 리튬배터리의 대체제가 되고픈 나트륨배터리. 정작 그 운명은 리튬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By.딥다이브
배터리 관련주에 투자한 분들을 요즘 참 많이 봅니다. 다들 지식 수준도 상당한데요. 문제는 이 산업이 아직 표준화가 안 되어 있고 새로운 기술이라서 변화무쌍하다는 겁니다. 이를 둘러싼 경제환경도 예측이 쉽지 않고요. 솔직히 리튬가격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줄 누가 알았나요(딥다이브 리튬편 참고). 결국 지속적인 공부밖엔 답이 없겠는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스웨덴 배터리 제조사 노스볼트의 나트륨이온배터리 개발 소식으로 다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집니다. 중국 CATL은 올해 안에 체리자동차의 소형 전기차에 나트륨이온배터리를 장착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매장량이 풍부한 소재인 나트륨의 가격은 리튬의 76분의 1 수준. 안정성이 높아 고온과 저온에서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에너지 밀도. 같은 크기나 무게이면 주행거리가 더 짧아집니다. LFP배터리의 80~90%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전기차에 쓰이긴 부족해 보입니다. 우선 이륜차와 카트, 에너지저장장치에 쓰일 거란 전망입니다.
-나트륨배터리의 앞날을 결정하는 건 리튬가격이 될 겁니다. 만약 1년 새 77% 급락한 리튬가격이 더 추락한다면 나트륨배터리의 가성비가 그리 빛나 보이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