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김정은, 대남관계 단절]
트럼프, 美공화당 첫 경선 과반 득표
김정은 “조평통 등 대남기구 폐지
대한민국은 제1 적대국 헌법 명기”… 핵보유국 인정 노린 통미봉남 노골화
김정은 최고인민회의 참석… 트럼프 “그는 나를 좋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사진)이 15일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한국은 불변의 주적” 등을 헌법에 명기하라고 했다. 또 대남기구 폐지까지 지시하며 남한을 겨냥한 위협 수위를 대폭 끌어올렸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미 공화당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과반 득표율로 승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날 유세 연설에서 김 위원장을 언급하며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는 그와 잘 지냈다”고 주장했다. 노동신문 뉴스1·디모인=AP 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과의 대화를 완전히 단절한 채 차기 미 행정부와 핵보유국 인정 직거래를 시도하겠다는 위험한 도박을 시작했다. 16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 위원장의 전날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발언은 이런 근본적 노선 전환을 분명히 보여준다. 김 위원장은 “한국은 불변의 주적” 헌법 명기,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등 대남기구 폐지를 지시했다. 한국은 북핵 문제 등 어떤 대화나 교류의 상대도 아니라는 선언이다. 김 위원장은 미국을 비판했지만 대미 대화 단절은 거론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15일(현지 시간) 미 대선의 첫 관문인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과반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다.
트럼프 전 대통령 대세론이 본격화된 시점에 김 위원장이 내놓은 발언은 조만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 예상되는 가운데 북-러, 북-중 밀착에 기대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을 고립시키고 판을 흔들겠다는 새로운 대외 전략의 시작이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미국 대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자신이 직접 트럼프 전 대통령과 북핵 동결과 제재 해제 담판에 나서는 게 가능하다고 보고 윤석열 정부를 이 거래에서 배제하는 통미봉남을 시도하겠다는 뜻을 노골화한 것”이라고 당국도 보고 있다. 대북 압박 정책 위주의 우리 정부 스탠스가 애매해질 수도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현 정부의 대북, 외교안보 정책에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5일 “헌법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같은 표현을 삭제하고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간주하도록 교육하는 내용을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이날 남북 회담과 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조평통과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했다.
김 위원장이 “헌법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라”고 한 대목도 눈에 띈다. “통일 개념을 완전히 제거하라”면서도 ‘김정은식 무력통일 노선’을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김정은, ‘트럼프 시즌2’ 핵동결-제재해제 담판 노려… 南 완전배제
정치부장의 D브리핑
바이든의 한미일 3각공조 흔들고… 서방제재 풀어 경제난 탈출 모색
김일성-김정일 통일노선까지 부정
“영토-영해 0.001㎜ 침범 땐 전쟁”… 尹 “北 스스로 반민족적 집단 자인”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우리 정기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10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6일 북한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이날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신문 뉴스1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국과는 대화도 교류도 하지 않겠다는 남북 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선언한 반면 미국에는 “반공화국 대결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대화 단절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집권할 경우 핵 동결과 대북 제재 해제를 맞바꾸고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이른바 ‘김-트 직거래’가 가능하다고 김 위원장이 판단했다는 유력한 증거다. 한국을 대화, 교류 상대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근본적 변화를 헌법에 반영하겠다는 공언 이면엔 트럼프 집권 시 가능하다고 본 북-미 간 직접 협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실제로 북핵 문제에서 김 위원장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2019년 이른바 ‘하노이 노딜’ 전까지 두 사람은 직접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북핵 동결 카드는 하노이 노딜 이후 협상 재개를 위해 당시 트럼프 정부에서 거론됐던 방안이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핵 동결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하기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가짜뉴스”라고 부인했지만 북핵 등 한반도 문제에서 발을 빼고 미중 패권경쟁에 집중하려는 그의 구상이나 집권 시절 보인 행보를 보면 개연성이 작지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4일 아이오와 코커스를 하루 앞둔 유세에서도 “김 위원장은 똑똑하고 터프하다. 나와 잘 지내서 미국이 안전했다”고 주장했다.
● 통미봉남에 통일봉남까지 韓 고립 시도
김 위원장은 이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해야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서 대폭 강화된 한미일 3각 협력에 균열을 내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인한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 김 위원장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1차 정상회담에 나서면서 북핵 동결과 제재를 맞바꿔 미국 등의 경제 지원을 받는 발전 전략이 가능하다고 군부를 설득했다는 게 정통한 대북 소식통의 전언이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직전까지 북-미는 협상의 디테일에서 진척이 없었다. 협상 결렬 이후 분노한 김 위원장은 북-미 간 북핵 협상 전략을 버린다. 이후 글로벌 신냉전 구도에 올라타 러시아, 중국과 밀착해 각종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난 위기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심각해지는 경제난을 돌파하고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는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 한반도 정세의 판을 다시 흔들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뿐 아니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납북자 문제에서 북-일 대화에 적극적이다. 이를 이용하면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시 통미봉남은 물론이고 통일봉남으로 한미일 3각 협력을 무너뜨리고 한국 고립이 가능하다고 볼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이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 일본과 대화하려는 신호”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카드를 위해 북한은 미 본토를 사정권에 둔 신형 고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이고 미국의 주요 핵전력이 있는 괌 미군기지를 타격할 신형 고체연료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발사하며 도발 강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 시절 2018년 북-미 간 협상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2017년 북한은 도발 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최근 대남 초토화를 위협하며 “전쟁을 피할 생각이 없다”고 공언하는 것도 이런 불안감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당국자들은 이 때문에 “트럼프 집권 시 김정은-트럼프 직거래로 윤석열 정부가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며 트럼프 리스크를 우려한다.
● “김정은 정권 안전 위해 영구 분단 추구”
최근 한국을 “주적”,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한 김 위원장은 15일 “평양의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이 내세운 통일 노선도 부정해 버린 것이다. 북방한계선(NLL)이 “불법 무법”이라고 주장한 뒤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 영공, 영해를 0.001mm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장기화 속 심각해지는 경제난으로 인해 누적되는 주민들의 체제 불만을 외부의 적, 즉 한국에 돌리려는 의도다. 이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주민들 사이에 퍼지자 이를 대남 적개심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체제 내부의 불만이 크다는 뜻이다. 김천식 통일연구원장도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위해 영구 분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동경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남북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대남 도발의 책임을 현 정부에 돌리는 ‘갈라치기’ 수법으로 남남 갈등을 일으키려는 의도도 있다. 이를 의식한 듯 윤석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며 “‘전쟁이냐 평화냐’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이런 전략엔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대남 대미 도발의 수위를 높일수록 무기 개발에 자원이 더 투입되고 경제난은 악화된다. “체제 불안을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될 수 있다”고 정부 고위 당국자가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