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대명사’ 지위 흔들
‘파괴적 혁신’의 대명사였던 애플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를 강타한 인공지능(AI) 열풍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오픈AI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아마존 같은 기존 경쟁자들이 공격적인 투자와 신규 AI서비스를 내세워 질주하는 가운데, 애플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투자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하드웨어 부문의 경쟁력으로만 먹고사는 ‘2등 기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다.
◇역주행하는 애플
3일(현지 시각)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플은 값비싼 AI 추격 게임에 직면해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애플이 10년 동안 매달려온 애플카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해당 부서의 자원을 AI로 재배치하기로 했지만, 앞선 경쟁자들을 따라잡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애플 주가는 올 들어 3.22% 하락했다. 같은 기간 MS가 12.03%, 아마존이 18.87% 올랐고, 대표적인 AI 수혜주인 엔비디아는 70.82%, AMD는 46.23%, 수퍼마이크로컴퓨터는 217.21% 폭등했다.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던 애플은 왕좌를 MS에 넘겨주며 2위로 밀려났고, 엔비디아에 추격당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규모 잉여 현금을 보유하는 애플의 경영 방식이 AI 경쟁에서 밀려난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애플의 잉여 현금은 1070억 달러 수준으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 중 가장 많다. 공급망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은 돌발 상황에 언제든 대비하는 안전한 방식이지만, 동시에 연구·개발(R&D) 또는 인프라 구축에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애플의 지난해 R&D 지출액은 300억 달러 수준으로 매출액 대비 비율이 7.8%에 그쳤다. 주요 빅테크 기업인 메타(28.5%), 아마존(14.9%), 알파벳(14.8%)보다 현저하게 낮다. 돈은 많은데 쓰는 걸 주저하다 보니 AI 같은 새로운 분야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애플은 지난해 10월 생성형 AI 제품 개발에 연간 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10년간 100억 달러 이상을 쏟은 애플카 프로젝트와 비슷한 규모의 투자다. 이 투자금은 AI소프트웨어, 자체 AI반도체 개발과 함께 데이터센터 같은 인프라 구축에 쓰일 전망이다. 애플의 데이터센터 수는 26개로 300개 이상을 운영하는 MS·아마존·구글에 한참 못 미친다. 심지어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AI반도체 가격은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며 치솟고 있다. 애플의 AI 관련 지출이 회사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커질 수 있는 데다, 돈을 쏟는다 해도 시설 구축에 시간이 걸려 경쟁사들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애플의 DNA가 독 됐나
팀 쿡 CEO는 지난달 28일 주주총회에서 “우리는 생성형 AI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고, 하반기에 구체적인 AI 관련 발표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애플은 자체적으로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개발하고 있으며, 향후 모든 기기에 AI를 접목시키려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테크 업계에선 “애플카처럼 단숨에 시장을 선도하려고 획기적인 ‘색다름’을 추구하다간 AI 시장에서도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블룸버그의 애플 전문가 마크 구먼은 3일 “애플카는 테슬라와 나머지 완성차 기업보다 나은 자율주행차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몰락했다”고 평가했다. 애플은 차근차근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는 대신 한번에 핸들과 페달이 없는 미래차를 만들겠다는 오만을 부렸고, 그 결과 실제 제품은 나오지도 못하고 개발 기간만 한없이 늘어지다 결국 실패했다. 한 테크 업계 관계자는 “오픈AI, MS, 구글 등이 모두 완벽하지 않은 AI서비스를 일단 출시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면서 “애플이 기존 방식대로 우리만 할 수 있는 AI, 더 훌륭한 AI를 목표로 한다면 아예 경쟁할 기회조차 잡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