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법, 친일 기업가·문학인 등 재판 회부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 해체 수순
친일파 의해 공소시효 단축 등 유명무실화
[이데일리 김형일 기자] 1948년 9월 7일, 제헌 국회는 논의 끝에 재적 141명 중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반대 입장이었으나 거부할 경우 제출한 양곡 매입법이 통과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15일 후 반민법을 서명, 공포했다.
1948년 12월 8일 반민특위 재판광경.(사진=국회도서관)
반민법 시행으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청산할 길이 열렸다. 같은 해 10월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산하에 특별경찰대(특경대)를 활용해 일제 강점기 친일 기업가였던 박흥식, 일본군 입대 선전에 참여한 시인 최남선 등을 검거하고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1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1949년 5월 북한 공작원에게 협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의원들을 구속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이문원·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이 구속됐는데 대부분 반민특위에 참여하거나 반민법을 통과시켰던 소장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친일파로 지목된 전봉덕 헌병 사령관, 김정채 헌병 사령부 수사 정보과장, 서울지검 검사 오제도,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이 수사했다. 구속된 의원들은 3~1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국회 프락치 사건의 도화선이 됐던 북한 공작원이 한 번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해 12월 총살된 점, 훗날 오제도가 “공산당을 잡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발언한 점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구속된 의원들의 석방을 주장했던 의원들도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렸으며 300~400명의 군중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몰려가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문을 습격했다.
특경대도 습격을 면치 못했다. 반민특위가 최운하 등 친일파를 체포하자 내무차관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는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등 위협했다. 이 과정에서 특경대는 폭행당하고 분산 감금됐다. 검찰관은 총기가 압수되고, 사무실 서류와 집기를 빼앗겼다.
결국 국회 프락치 사건 한 달 만인 1949년 7월 6일 반민법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들은 반민법 공소시효를 기존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특위 위원 전원이 사표를 냈다.
1949년 9월 23일에는 반민특위를 비롯해 특별검찰부·재판부가 모두 해체됐다. 이날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부속기관법’에 대한 폐지안, 반민법 개정안(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 업무를 대검찰청, 대법원으로 이관)이 통과돼서다.
결국 반민특위는 총 취급 건수 688건, 체포 305건, 자수 61건, 검찰 송치 559건, 기소 221건, 재판 종결 38건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입건된 반민 피의자 중 0.6%만 법정에 선 셈이다.
여기에 1951년 2월 14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 시행으로 반민법이 폐지됐다. 이에 따라 반민법과 관련해 공소 계속 중의 사건도 공소 취소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1949년 9월 22일 반민특위조사부기념사진.(사진=국회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