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휩쓴 AI, 빅테크 파워 입증
지금까지 노벨 과학상은 유럽과 미국, 일본의 연구소와 대학이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올해 노벨 물리·화학상 수상자 5명 가운데 3명은 실리콘밸리의 빅테크인 구글 출신이다.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구글에서 일하며 부사장까지 지냈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미스 허사비스는 구글의 인공지능(AI) 자회사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고, 존 점퍼 박사는 이 기업의 핵심 연구원이다.
AI가 휩쓴 올해 노벨 물리·화학상 수상 결과는 과학계 연구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기존엔 대학·연구소의 실험·관찰 중심이었다. 이젠 기초과학 연구 방법론이 대규모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AI 활용 연구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AI에 초기부터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온 실리콘밸리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가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졌다. 대학·연구소와 비교가 되지 않는 빅테크의 자금력은 기존에 없던 규모와 속도로 기초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9일(현지 시각)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실리콘밸리가 가진 영향력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고 평했다.
◇과학계 ‘큰손’ 된 빅테크
빅테크 기업들이 투자를 하는 기초과학 분야는 생명공학과 양자 컴퓨팅, 첨단 소재 등이다. 사업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영역들이다. 구글은 특히 생명공학 분야 연구 투자에 적극적이다. 지금까지 누적 투자액 1조9700억달러 중 14.7%, 2900억달러(약 391조원)가 생명공학 분야다. 올해 노벨상을 받은 구글 딥마인드의 허사비스가 개발한 단백질 구조 예측 AI ‘알파폴드’는 신약 개발에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딥마인드는 주어진 가설을 기반으로 실험을 제안하고, 실험의 성공 확률까지 계산할 수 있는 ‘AI 연구실 조수’도 개발하고 있다. 기초과학 연구의 실패 확률을 낮춰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메타는 ‘찬 저커버그 이니셔티브’ 재단을 통해 AI를 활용한 질병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세포 내 단백질의 사진 데이터를 훈련한 AI를 만들 계획이다. 건강한 세포와 질병에 걸린 세포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이 목표다.
애플은 스마트 시계인 ‘애플워치’로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해 의료진의 연구를 지원한다. 심장병, 수술 후 회복한 환자의 상태 등 연구에 활용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플 워치가 의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의료기기가 되고 있다”고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과학을 위한 AI(AI for Science)’라는 팀을 조직했다. AI를 통해 약물 발견부터 친환경 에너지 설계까지 다양한 자연과학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머신러닝, 양자물리, 분자생물 등에서 전 세계 전문가로 구성했다. MS가 개발한 ‘생성 화학’은 수억개의 화합물을 훈련한 AI가 특정 산업에 적합한 분자를 찾아낸다. MS는 “세계의 모든 연구자가 독창성을 활용할 수 있는 최첨단 디지털 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빅테크가 기초과학 연구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 성과를 내는 것은 ‘데이터의 힘’이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빅테크들은 10여 년간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해 왔고, 이런 방대한 정보가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며 “막대한 자금으로 가장 우수한 연구 인력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기초과학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당시 유니콘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의 존 콜리슨은 바이러스 학자, 코로나 바이러스 전문가들에게 긴급 연구비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피터 틸 오픈AI 공동 설립자,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 등이 여기에 기부해 5000만달러(약 675억원)를 모금했고, 재단 설립 48시간 만에 연구자들에게 1만~5만달러의 연구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은 보고서를 통해 “지난 30여 년간 기업과 개인의 기초과학 연구 후원금은 15억달러에서 130억달러가 돼 10배 가까이로 올랐다”며 “이 중 대부분이 첨단 기술 기업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연구 독립성 침해 우려”
과학계는 AI의 비약적인 발전과 기초과학에서 빅테크의 영향력 확대를 엇갈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 지난 9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연구자 1600명을 대상으로 ‘AI가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문한 결과, 58%는 “혁신적인 연구 성과가 예상보다 빠르게 나온다”, 55%는 “과학자들의 시간과 예산을 줄여준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69%는 “연구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며 경계심을 보였다. 장병탁 서울대 교수는 “빅테크의 AI가 자연과학이나 의약학, 소재 기초 연구에 도구로 사용되면서 기초과학 연구에 기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하지만 AI 기반 연구의 주도권을 수익이 중요한 기업이 쥐고 있다는 것은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했다. 연구 주제가 편향되고, 결과가 잘못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 빅테크들이 대학·연구소의 뛰어난 인재를 데려가면서, 기초과학 교육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