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독주해 온 일본 정치 격랑 속으로
중의원 선거, 전체 465석 중 과반인 233석 확보 실패
일본 도쿄의 자민당(LDP) 본부에서 하원의원 선거 후 이시바 시게루. 사진: 토루 하나이/Bloomberg
일본 집권 자민당이 27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전체 465석의 과반인 233석 확보에 실패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의석을 포함해도 과반을 넘지 못해 지난 2012년 이후 사실상 자민당 독주 체제를 유지해온 일본 정계가 격랑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28일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마무리된 일본 중의원 선거 최종 개표 결과에서 전체 465석 가운데 여당인 자민당이 191석을 얻었다. 기존 247석에서 50석이상이 빠졌다. 연립여당을 꾸리고 있는 공명당이 기존 32석에서 이번에 24석에 그치면서 두 정당을 더한 의석 수는 215석으로 집계됐다. 야당이 나머지 250석을 가져갔다. 제 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148석을 차지하며 약진했다. 기존 98석보다 50석을 늘렸다. 이어 일본유신회 38석, 국민민주당 28석가 뒤를 이었다. 이들 두 정당은 자민당이 연립정당의 틀을 확대할 경우, 협상이 가능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신생 정당인 레이와신센구미가 9석, 공산당 8석, 참정당과 보수당이 각각 3석, 무소속 등이 12석이었다.
자민당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2012년 294석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 네 차례 중의원 선거에서 단독 의석이 260석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반대로 제1야당이 140석 이상을 확보한 것은 입헌민주당의 전신격인 민주당이 2003년 177석을 얻은 뒤 처음이라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이번 중의원 선거는 지난해 집권 자민당에서 불거진 ‘파벌 의원들의 정치 비자금 파문’에 대한 국민 심판을 받는 자리였다. 선거 시작 부터 투표일 전까지 자민당 의원들의 비자금 스캔들이 승패를 가르는 열쇠 구실을 했다. 자민당은 ‘비자금 스캔들’을 희석하기 위해 이시바 총리로 ‘당의 얼굴’까지 바꿨지만 제대로 된 정치 개혁안을 내놓지 못한 게 결정타가 됐다. 비자금 연루 의원 40여명이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민당 혹은 무소속으로 선거 출마를 강행한데다, 자민당 본부가 공천 배제된 의원의 소속 지부에 당 활동비 2천만엔(약 1억8천만원)을 지급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참패로 이어졌다.
새 정부 출범 27일만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조기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결단한 이시바 시게루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불가피하게 됐다. 당장 개표가 진행되는 과정에 사실상 자민당 참패가 확인되자마자 이시바 총리 사퇴론이 거론되고 있다. 가능성이 낮지만 이날 현재 취임 28일이 된 이시바 총리의 사임이 이뤄질 경우, 역대 최단명 정권 기록을 새로 쓸수도 있다. 앞서 일본에선 1994년 비자민당 소수 정당들이 뭉쳐 만든 하네다 쓰토무 정권이 출범 64일만에 교체됐다. 자민당 따지면, 1988년 우노 소스케 총리가 취임 69일만에 사임한 사례가 있다.
자민당 안에서 ‘반 이시바’ 세력들이 결집해 갓 출범한 새 지휘부를 흔들 가능성이 점쳐진다. 특히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당선자와 막판까지 경쟁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또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을 공개 지지했던 아소 다로 자민당 최고 고문은 당 내에서 유일하게 파벌을 해체하지 않았고, 이시바 총리 지지 세력과 날을 세워온 ‘구 아베파’들이 여기에 가세할 경우 이시바 총리를 충분히 흔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취임한 지 불과 한달도 되지 않은 이시바 총리가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사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선거 패배의 근본 원인이 아베 신조 총리 시절부터 누적돼온 파벌 정치인의 비자금이나 통일교와 유착 의혹 등 자민당의 오랜 적폐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실제 이시바 총리는 중의원 선거 패배가 거의 확정된 가운데 한 언론 인터뷰에서 “직책을 완수하겠다”며 사실상 사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인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가 내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리 지명 선거를 위한 새 임시국회가 다음달 7일 소집될 것으로 보이는데, 남은 열흘 동안 당내에서 이시바 총리를 끌어내릴 만한 세력이 결집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09년 이후 15년 만에 자민당이 중의원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일본 정치권은 복잡한 시나리오를 써야하는 상황이 됐다. 자민당이 여당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명당이 확보한 24석을 포함해도 무려 30석 가까이가 추가로 필요하다. 우선 자민당은 무소속 당선자들을 끌어모아 최대한 ‘몸집 불리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이번 선거를 앞두고 불법 정치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자민당 공천 배제됐다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주요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당 핵심들이 야당 의원 포섭 작업에 직접 나설 수도 있다. 자민당은 지난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노나카 히로무 당시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야당 의원들을 상대로 ‘포섭 작전’을 벌여 단독 과반을 회보한 적이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당시 노나카 간사장 대행이 스스로를 (야당 의원들을 낚아오는) ‘낚시터 아저씨’라고 자조했다”며 “(야당 의원들을 데려오는 것은) 자민당이 과거 자주 사용했던 수법”이라고 짚었다.
조금 더 단순한 방법으로는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비슷한 성향의 야당에 손을 내밀어 연립의 틀을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미 이번 선거 과정에서 모리야마 히로시 자민당 간사장은 “(연립 여당의) 과반수 여부와 관계없이 같은 정책으로 국가 발전을 도모하려는 정당과 긍적적으로 협의해야 한다”거나 “정책적으로 일치하면 (다른 당과 협력을)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연립이 가능한 대상으로는 일본유신회와 국민민주당이 꼽힌다. 이들 정당은 이번에 각각 38석, 28석을 얻어 자민당이 집권당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한 의석을 채우기에 적당한 상황에 있다. 다만 두 정당 모두 선거 과정에서 이미 “자민당과 연합은 절대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