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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철학] (최정균의 유전자 천태만상) 자연이라는 체제 정당화한 ‘보수’…태생부터 일탈이자 투쟁인 ‘진보’ (0) 2024/11/16 PM 11:22

(16) 모태보수, 모태진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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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9월 10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웨스트 할리우드의 유명 게이바 ‘디 애비’에서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TV토론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임신중지권은 이번 미국 대선의 핵심 쟁점 중 하나다. 특히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로 임신중지권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해리스 부통령은 이 사안을 집중 공략하고 있으며 TV토론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보수 진영은 ‘생명 존중’ 차원에서 임신중지를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임신중지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생명을 인위적으로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웨스트 할리우드 | AFP연합뉴스


 

원초적 질서 따르고자 하는 기조인 ‘보수적 가치관’…기득권 자리 잡은 ‘자유시장 경제’ 등과 맥 이어져

진보적 사고방식 유도 ‘도파민 수용체 7R 변이’는 생존엔 불리하지만 문명의 발달 덕분에 살아남아

생물학적 언어로 정의한 ‘보수’는 최적화된 생존·번식 위한 진화의 산물…‘진보’는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


‘모태보수, 모태진보’ 시리즈의 지난 두 글은 보수와 진보의 생물학적 차이를 설명하는 3가지 열쇠에 대해 설명했다. 편도체-교감신경, 세로토닌-도파민, 그리고 리포칼린-후각수용체가 그것이었다. 즉 보수적인 정치 성향은 편도체의 작용으로 설명되는 경계심과 혐오, 세로토닌의 역할과 관련된 사회적 서열 행동, 또한 페로몬에 의해 매개되는 짝짓기 관련 행위로 설명된다. 위험을 회피하고, 힘의 질서에 따라 행동하며, 성공적인 생식을 해내는 것은 모두 진화적으로 유리한 ‘자연스러운’ 특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보수 성향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적 전략들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이렇게 생물학적으로 보수 성향인 사람들이 가진 심리를 ‘체제 정당화(system justification)’라고 한다. 이것을 존 조스트 뉴욕대 교수와 마자린 바나지 하버드대 교수는 ‘현 상태(status quo)’를 합리화하는, 즉 기성 체제가 정당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성향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와 문화는 변동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에 보수가 정당화하고자 하는 ‘현 상태’를 어느 특정한 사회나 문화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인간이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항상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생물학적인 뇌신경 프로그램 속에 각인되어 있는 가장 원초적인 체제는 바로 자연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의 원리와 법칙 혹은 섭리야말로 보수가 중시하며 지키고 따르고자 하는 내재적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즉 보수적 가치관이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진화적 본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신념 체계로서 어쩌면 진화의 성공적인 산물로서 유전자 변이에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체제 정당화 이론이 사회체제에 대해 설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질서에 따르고자 하는 이러한 기조가 많은 경우 이미 사회의 기득권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체제 정당화 연구는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이루어졌는데,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힘과 경쟁의 논리를 따르는 자연질서가 그대로 경제체제로 구현된 것이다. 만일 그 연구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행되었다면 적어도 경제 항목에 대해서는 체제 정당화 양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보수인 사람들이 기성 체제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보수적 가치관은 자유시장 경제와 맥을 같이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보수적 입장에서는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정당하거나 적어도 목숨 걸고 저항할 만큼 부당하지는 않다.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사교육 기반의 엘리트 교육을 옹호하는 것은, 힘과 능력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경쟁을 정당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총기 소지를 통해 각자의 안전은 각자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참사는 국가 안전망의 부재라기보다 개인의 책임이나 불행으로 여기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들이 국가 안보와 군사력 강화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국가들을 경계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해외 원조나 개방적인 이민정책에 대한 이들의 부정적인 태도 역시 다른 인종이나 민족에 대해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위협과 거부감에 기인한다.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더 강력하고 심지어 대놓고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성적 취향이라는 편견도 같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동성애는 완전히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임신중지 역시 보수가 보기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생명을 인위적으로 빼앗는 행위이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데, 이러한 입장을 미국에서는 ‘생명 존중(pro-life)’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총기 사고로 숨지는 생명은 존중받을 만한 대상이 아닌 것 같다. 태어나는 아기들과는 달리 총기의 피해자들은 순수한 자연에서 멀어진, 문명에 의해 타락한 생명으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어쩌면 임신중지 시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범죄에 주로 노출되어 총기 피해자가 되는 흑인들은 보수가 중요시하는 자연적인 가치로 볼 때는 그저 낙오자들일 것이다. 자연 세계에서는 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역시 자연에 대해 이루어지는 체제 정당화와 관련이 깊다. 먼저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공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자연 그대로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가치관과는 갈등이 발생한다. 또한 새로운 것과 위험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은 자연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인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백신, 원자력, 유전자변형작물(GMO) 등에 대한 보수 진영의 확연히 비우호적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공화당이 과학 정책과 투자에 미온적인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다는 종교계의 우려를 빌미로 줄기세포 연구비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은 보수주의의 이러한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기간 중 과학에 악영향을 미친 사례로 여러 과학기관에 대한 재정 삭감, 미 항공우주국의 달 착륙 계획 수정,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 그리고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주먹구구식 대응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지난 미국 대선이 임박했던 2020년 말 과학자 892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는 8%에 그쳤다고 밝혔다.


과학에 대해 보수와 진보는 인지적인 차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가나자와 사토시 런던대학교 정치경제대 교수는 <지능의 역설>에서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지능지수가 높다는 조사 결과들을 제시한다. 가나자와 교수는 과학적 사고와 논리 능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현대적 개념의 지능지수가 높다는 것은 진화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성질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확실히 지능이 높은 사람은 뛰어난 의사, 뛰어난 우주비행사,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직업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생활에서 중요한 일들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의사나 우주비행사, 과학자가 될 수 있게끔 만들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지능지수는 사회적 관계를 잘 맺거나, 성공적인 연애를 하거나, 좋은 부모가 되거나, 길을 잘 찾거나 하는 등 생존이나 생활과 관련된 지능과는 오히려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 중에는 ‘헛똑똑이’가 꽤 많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의 언어로 정의해보면, 보수주의는 인간의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최적화된 진화의 산물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 환경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일체의 에너지를 당장의 생존 투쟁에 쏟아부어야 하는 절대 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베블런의 주장은 생물학적으로 보완이 가능하다. 생존에 대한 위협과 경쟁에 민감한 환경은 편도체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보수 성향을 부추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리학적 조건은 사회정책에 대한 인식에도 반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대처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다른 나라들이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취업이나 임금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 더욱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 정책적인 면에서 국방, 안보, 이민 등에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진보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등장했고 현대사회에서 이토록 광범위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진보적 성향과 연관되어 가장 잘 연구된 유전변이는 도파민 수용체 7R인데, 이 변이가 유도하는 형질, 즉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성향은 항상 생존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의 탐색에는 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의 연구진은 이 변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이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후 인구가 급증하고 혁신적인 제작 기술들이 등장한 후기 구석기시대와 일치하며, 이때의 시대적 환경이 7R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후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점점 덜 받게 되면서, 7R의 불리한 점이 상당 부분 보호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과거였다면 각종 질병이나 영양결핍으로 사라졌어야 할 변이들이 현대사회에서는 살아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성향이라는 ‘부자연스러운’ 변이들 역시 문명의 발달 덕분에 자연선택에 역행해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생존과 번식에 대한 자연선택의 압력이 약화되면서, 보수적 성향이라는 ‘자연스러운’ 변이들의 상대적인 유리함도 완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생존과 번식에 대한 진화적 압력에서 인간이 더더욱 자유로워진다면 이러한 경향은 더 두드러질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이 때로는 자연적인 본성의 윤리적 부당함에 대해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사회에 전파하고, 그것을 사회 안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점이다.


이제 ‘모태보수, 모태진보’ 시리즈를 마무리할 때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상식선에서 어림짐작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의는 모호하기만 했다. 경제, 교육, 외교, 사회, 과학기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두 진영의 입장을 분석해보면, 보수는 전통을 옹호하고 진보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사전적 정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관적이고 내재적인 공통의 신념 혹은 가치관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정의 가능한 보수와 진보는 다음과 같다. 보수란 성공적으로 진화한 유전자들의 발현이자 자연이라는 원초적인 체제에 대한 정당화이며, 진보란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다.



■최정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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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교수로 2009년부터 재직하며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목표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유전학적 원인 규명과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이며, 진화론을 접목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아산의학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정 과학기술인상을 포함해 여러 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과학기술한림원 선도과학자,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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