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국의 황족, 흥영군 이우
이우(李 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조선 황실 황족이다.
의친왕의 둘째 아들.
유약한 성격이었고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과 달리,
아버지 의친왕의 기개를 닮았으며 총명하고, 수려한 외모에 왕족으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나 일본인에게는 사납고 냉정하였고,
"호랑이 같은 조선 왕족의 핵심"
으로 불리며 일본의 감시·경계 대상이었다.
나이 다섯되던 해 흥선대원왕 집안의 종주 이준용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부인 김씨가 고종에게 간곡히 아뢰길 "황실의 근본인 흥선대원왕가에 손이 끊겼으니,
양자를 들여 맥을 잇게 해주십시오" 했다.
이에 고종이 친히 의친왕의 둘째 아들 어린 이우의 손을 잡고 운현궁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 아이로 하여금 운현궁을 잇게 하라" 했다.
고종이 임명한 운현궁의 종주 이우는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흥왕이 되어야 할
당당한 황가의 일원이나 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자, 흥왕이 아닌 공작으로서 불리워진다.
일본이 일본 왕족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하자,
이우 왕자는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며 버텼다.
독립운동가 유동렬의 딸과 정혼했지만, 결국 일제의 반대로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타협'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종은 "황실의 기상을 드높였다"며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일본은 자기네 왕족의 '급'을 높이기 위해 미혼의 조선 왕족은 일본 왕족과
결혼시키도록 지침을 정해두었다. 후에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 역시 일본 왕족과 결혼했으며,
이우 왕자의 형인 이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는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 일제의 요주 감시 대상이었다.
일본에서도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거의 사용하였으며, 조선 출신 생도에게는 조선말로 크게 호령하였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를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꾼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토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 황성 옛터 中
또한, 일본군 정보 참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고 한다.
왕자는 1940년 육군대학 54기를 졸업하는 것으로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942년 소좌로 진급한 황족으로서 선봉에 서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중국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으로 전출되었다.
이후 북지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왕자는 중국 태원에서의 근무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이우 왕자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 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왕자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한다.
그 사이 왕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다 결국 설득 끝에 히로시마로 가게 되는데, 왕자가 히로시마에 간 그날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부상을 입는다.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상태가 호전되는 듯 하였는데, 그날 밤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8월 7일)
(이우 왕자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이 왕자의 부상을 틈타 독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후에 왕자의 시신은 조용히 귀국하여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다.
공교롭게도 그의 장례식날에 일왕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니 바로 그날이 8월 15일이며,
왕자는 죽어서야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었다.
그 해 왕자의 나이는 34세였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 타케히코(朝香孚彦/朝香宮孚彦王, 1912년 ~ 1994년)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라고도 말했다.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에 이우 사망 소식이 1면에 보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