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수도 경주는 크게 번성하여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의 경주 모습을 묘사한 기록에는, “도성 안에 기와집만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신라의 왕경인들이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모습을 비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시 경주가 얼마나 번성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통일신라 시대는 온돌문화가 보급이 안되서 옛날 일본식 집처럼 집안에 화로를 피워서 난방하는구조
연기가 많이 나고 결국 2층 이상의 복층식 높이로 올라가고 연기가 순환되고 화재를 막을려고 초가집 보단 기와집을 채택함...결국 신라가 발전으로 인해 저런모습이 된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문화의 일부분이였던거...
과장이 아니라 진짜...저때 통일신라는 복층식이였습니다.
조선시대때도 보기 힘든 2~3층 건물이 널려있던 시대였는데 이유는 발전되거나 그런게 아니라 온돌기술이 없어서에요 ㅋㅋ 온돌문화가 아직 자리잡지 못했고 그결과 화로를 피워 난방을 하는 구조여서 연기 순환이 잘되도록 복층식이 됨.
복층식이 되면서 집은 평균 2~3층 높이로 커지고 당연 기와집이 기본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