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야구 천재가 이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됩니까. 열심히 치료해서 얼른 일어나이소."
"노력해볼게."
이게 마지막이었다. 삼성 송삼봉 단장이 지난달 30일 암투병중이던 고 장효조 2군 감독과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1분간 얼굴을 맞대고 나눈 대화였다. 송 단장도, 장 감독도 뻔히 상황이 어떤 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얘기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고인은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은 뒤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왔다. 현역시절 '타격의 달인'으로 불린 고인은 투병중인 자신의 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했다. 불과 한달여 전만 해도 1군 경기가 열리는 대구구장을 찾아가 부진한 선수를 보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저 녀석은 저렇게 치면 안 되지"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던 고인이었다.
지난달 30일 송삼봉 단장이 부산 원정때 홍보팀 직원과 함께 동아대병원을 찾아갔다. 장 감독의 아들이 나와 "아버지께서 면회를 원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했다. 송 단장은 세살 많은 고인과 30년간 인연을 맺은 절친한 관계다. 10분 이상 밖에서 얘기하며 송 단장이 간곡히 부탁해 결국 면회가 이뤄졌다. 짧은 1분간의 만남이었다.
송 단장은 "면회사절이라고 본래 알고 있었지만 꼭 만나야 했다. 결국엔 병실에 들어갔다. 이미 복수도 많이 차고 황달 증세가 한눈에 보였다"고 말했다.
송 단장은 그날 장 감독의 손을 붙잡고 "아직 죽은 것 아니다. 목숨 살아있지 않나. 1%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열심히 치료합시다. 타격의 달인이 이 정도로 이러고 있으면 됩니까. 살아서 이겨내야지"라고 말했다.
장 감독은 "노력할게"라고 답했다 한다. 송 단장은 "야구 천재가 이 정도도 못 이기면 됩니까. 병원비 같은 거 걱정 말고 모든 건 구단에서 알아서 할테니 치료해 전념하이소. 야구로 돌아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하루 뒤인 31일에는 삼성 김 인 사장과 운영팀장이 짧게나마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송 단장은 이에앞서 지난달 초순에 장 감독이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해있을 때에도 잠시 면회를 갔었다. 그때만 해도 고 장 감독은 얼굴이 조금 수척해있고 음식을 잘 먹지 못해 살이 빠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그즈음에 고인은 간과 위에 암이 퍼져있어 4기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장효조 감독은 지난 7월2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때만 해도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레전드 올스타 행사 전후로 장 감독은 주변 지인들에게 "조금 몸이 안 좋은 것 같네. 이상하네"라고 말했다 한다. 당시 "소화가 잘 안 된다"면서 트레이너들에게 약도 받아갔다고 한다. 그후 가까운 병원을 거쳐 서울 삼성의료원까지 갔고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선 "더이상 치료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이후 장 감독은 동아대병원으로 옮겨 투병생활을 해왔다. 삼성 2군은 양일환 코치가 감독대행 역할을 맡았다.
장효조 감독은 7일 오전 7시30분 별세했다. 향년 55세. 빈소는 부산 동아대학교 병원 장례식장(051-256-7015) 5호실. 발인은 9일 오전이다.
삼성은 7일 저녁 한화와의 홈게임때 단체응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현수막을 내걸고 전광판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 경기전 묵념이 있을 예정. 삼성 선수단은 8일 광주 원정경기를 마친 뒤 부산으로 이동해 조문하기로 했다.
아... 왜 자꾸 눈물이 나냐..
장 감독은 지난 6월. 1군 합류가 가까워진 모상기에게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장 감독은 “이젠 너 스스로 해야 한다. 옆에서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치고 고민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모상기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효조 감독이 제일 열심히 훈련시켰다는 모상기...
지난해부터 삼성 2군 사령탑으로 활약한 장효조 감독은 그러나 7월 중순부터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다. 지난 7월28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어이없이 역전패한 삼성 2군 선수들은 "감독님이 보셨으
면 큰 일 났을 것"이라며 반성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장 감독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투병 생활
을 시작했다. 그즈음 장 감독을 만난 삼성 류중일 감독은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더라. 가슴이 푹 들
어가셨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7월16일 퓨처스 올스타전에서만 해도 정정한 모습이었
던 장 감독은 "2군 선수들도 잠실구장에서 한 번 뛰어봐야 한다. 잠실구장 잔디 한 번 밟지 못하고
유니폼 벗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퓨처스 올스타전이라 할지라도 잠실구장에서 한 번 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군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하러 해외에 나가면 뭐하나. 잠실구장 같은 곳에서 한
번 뛰어야 선수도 큰다. 퓨처스도 멋진 곳에서 한 번 올스타전을 치러야 하지 않겠나"라고 역설했
다. 그는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생각한 불멸의 야구인이었다.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장효조감독님 좋은곳으로 가세요...
밑에는 그의 대기록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프로때 보다 아마추어때 더욱 날아다니셨다는군요...
▲ 통산 타율 0.331
장효조는 10시즌 동안 무려 8차례나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983년 삼성에서 데뷔와 함께 타격왕을 차지하며 7년 연속 3할 타율을 쳤다. 그가 기록한 통산 타율은 3할3푼1리. 3000타석 이상 들어선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3할3푼대를 쳤다. 그에 이어 양준혁이 3할1푼6리로 2위에 올라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 가능하다. '타격기계' 김현수(두산)가 데뷔 후 6년간 2509타석에서 통산 타율 3할2푼6리를 기록 중이지만 롱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종범(KIA)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5년간 통산 타율 3할3푼2리를 쳤지만 지금은 2할9푼7리까지 떨어졌다.
▲ 타격왕 3연패
장효조는 1983년 첫 해부터 3할6푼9리라는 고타율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7세.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신인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데뷔 첫 해부터 타격왕에 오른 건 그와 1993년 삼성 양준혁밖에 없다. 이후 장효조는 1985년(0.373)·1986년(0.329)·1987년(0.387)까지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다. 빙그레 이정훈이 1991~1992년 2연패했을 뿐 누구도 3년 연속 타격왕을 하지 못했다. 통산 타격왕 4회. 양준혁(1993·1996·1998·2001년)만이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한 기록이다. 당분간 누구도 깨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 3할6푼대 3회
역대 프로야구 한 시즌 최 고타율은 1982년 원년 MBC 백인천이 기록한 4할1푼2리. 그 다음이 1994년 해태 이종범으로 3할9푼3리다. 3~4위는 모두 장효조가 갖고 있다. 1987년 3할8푼7리를 기록했고, 1985년에는 3할7푼3리를 때려냈다. 역대 한 시즌 최고타율 10위 안에는 장효조의 이름만 3차례나 들어가 있다. 1983년 기록한 3할6푼9리는 역대 8위에 해당하는 기록. 역대 10위에 2회 이상 이름을 올린 건 장효조가 유일하다. 그외 선수들은 1차회씩만 이름을 올렸다. 3할6푼대 고타율만 3차례나 기록할 정도로 정확성에서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 출루율 1위 6회
장효조의 진가는 배트로 공을 정확히 맞히는 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야구계에는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나돌았다. 그만큼 선구안이 좋았다. 10년간 통산 볼넷 506개, 사구 27개. 1983년(0.475)부터 1984년(0.424)·1985년(0.467)·1986년(0.436)·1987년(0.461)까지 5년 연속 출루율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롯데로 이적한 1991년에도 4할5푼2리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출루율 1위만 무려 6차례. 1989~1990년 해태 한대화를 제외하면 누구도 2년 연속 출루율 1위를 하지 못했다. 장효조를 제외한 최다 출루율 1위는 양준혁의 3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