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전설 벽의 궤적 에볼루션
플레이 시기 - 2014년 7월
플레이 타임 - 68시간
벽의 궤적은 전작인 제로의 궤적을 잇는 작품으로 제로의 궤적 발매 1년 후인 2011년 발매되었으며 크로스벨편의 두번째 작품이자 완결편입니다. 타이틀명은 처음 정보가 풀리고 있을 땐 '푸른 궤적'이란 이름으로 밀었는데, 오프닝곡 제목이 碧の軌跡과 미묘하게 다른 碧い軌跡, 즉 진짜 푸른 궤적이란걸 알고는 이후론 그냥 벽의 궤적이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 뭐 사실 시리즈의 전통을 생각하면 오프닝곡이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벽의 궤적이 맞겠지만요. 전작이었던 제궤가 워낙 마음에 들어서 후속작을 정말 애타게 기다렸던데다 벽궤도 상당히 만족스런 작품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몰입하고 플레이해서 처음 시작한지 딱 열흘정도만에 클리어했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PS 비타 발매후 제로의 궤적 에볼루션에 이어 2014년 6월 벽의 궤적 역시 에볼루션판이 발매되었습니다. 제로에볼이 초반 프리징 문제로 워낙 평이 나빴고, 어레인지된 BGM에 대한 악평도 있어서 아오에볼, 즉 벽궤에볼은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이 결국 나오긴 했네요. 게다가 풀보이스 외에는 딱히 메리트가 없었던 제로에볼에 비해 벽궤에볼의 경우, BGM 어레인지도 나름 괜찮았고, 이런저런 일러스트도 추가하고, 음성이 들어가는 메인 스토리 이벤트의 경우 오토 기능도 추가하는 등 제로에볼에 비해 조금 더 성의를 보이긴 했습니다. 제로에볼과 같이 애니메이션 오프닝도 추가되긴 했는데, 이건 뭐 철저히 벽궤를 기존에 플레이해본 팬들을 대상으로 만든건지 본편의 핵심 반전 요소 몇가지를 스포일링하는 대단한 짓도 저질렀고요. 아무튼 최소한 이번엔 발매 초기 프리징같은 정신나간 문제를 일으켜서 자폭을 시전하진 않았으니까요. 물론 한정판을 피규어, 드라마CD 특전을 갈라서 두 개로 나누고, 그 두 한정판을 또 세트로 묶어서 팔기도 한 캐러애니의 엽기적인 상술은 가관이었지만... 거기 그대로 낚여준 제가 뭐라 할 입장은 못되겠죠.
일단 전체적인 게임은 전작 제로의 궤적에서 바로 이어서 개발한 작품인만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습니다. 굳이 달라진 점을 몇가지 꼽자면 우선 이동의 편의성이 개선되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스토리상 특무지원과가 자동차를 한대 지원받고 최종적으론 비행선 하나를 운용하게 되면서 이용해 게임 내 장소들을 전작의 버스보다 훨씬 편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투면에선 마스터 쿼츠라는 상당히 중요한 시스템이 생겼는데, 마스터 쿼츠는 하나씩만 가질 수 있으며 캐릭터들마다 하나씩 장착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 쿼츠는 일반 쿼츠와는 달리 종합적인 능력치를 올려주며 전투시 일정 턴동안 능력치 상승, 크리티컬, HP 흡수, 남은 HP와 반비례해서 공격력 증가 등 특수한 보너스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마스터 쿼츠 자체도 전투 시 경험치 획득을 통해 최대 레벨 5까지 성장하는데 이를 통해 이런 보너스 효과들을 강화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마스터 쿼츠의 속성별로 마스터 아츠라는 특수한 아츠를 발동시킬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특정한 상황, 특정한 시기엔 버스트 게이지를 모아서 버스트를 사용할 수 있는데 버스트 발동시 버스트 게이지가 고갈될 때 까지 아군의 턴이 유지되며 매턴 CP 보너스를 받고 아츠를 대기시간 없이 즉시발동할 수 있게 되는 등 어려운 전투를 풀어나가는데 상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후속작답게 크래프트나 아츠의 성능이 더욱 올라갔고, S크래프트가 추가됐으며 스탠딩 일러스트를 컷인에 돌려써서 힘빠지게 만들던 전작과 달리 컷인용 일러스트를 새로 그렸다는 정도의 변경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섬의 궤적까지를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전투는 벽의 궤적이 가장 재밌었습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섬궤에서 마침내 들어간 전투 중에 멤버를 교체하는 시스템정도랄까요. 섬궤2에는 기신전이 추가되기 때문에 어떨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섬궤의 전투는 벽궤에 비해 여러모로 심심했어요. 뭐 이건 밋밋한 모션과 초기작이다보니 아츠나 크래프트의 다양성이 이미 제궤를 거쳐서 볼장 다본 벽궤보다 떨어지고, 기억에 남는 전투도 딱히 없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인연 시스템의 경우 전작과 비교해서 상당히 본격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했습니다. 일단 레귤러 파티는 8명으로 이중에서 로이드와 더들리를 제외한 다른 여섯명의 캐릭터와 전작과 마찬가지로 각종 서브이벤트와 가구 구입 등 여러가지 요소를 통해 인연도를 쌓을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종장에서 인연 포인트를 일정치 이상 높인 캐릭터과 마지막 이벤트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에볼루션판이 되면서 이 이벤트는 풀보이스는 물론이고 일러스트도 한장씩 추가되었고요. 또한 키아, 더들리, 프랑, 세실, 이리아, 슈리의 경우에도 저정도로 본격적이진 않지만 인연 포인트 시스템이 존재해서 일정 수치 이상으로 높일 경우 종장에서 상당히 강력한 액세서리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벽궤를 통틀어서 가장 말이 많은 시스템이 이 인연 이벤트이긴 한데, 개인적으론 뭐, 팬들이 쓸데없이 과다하게 해석하거나 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는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크게 문제있는 시스템같지도 않아요. 관련 글을 읽어보면 나름 이해가 가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게임 제대로 플레이한게 맞나 싶을 정도로 스토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안되어 있는게 많아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거든요. 어쨌든 게임 내내 보여주는 캐릭터 사이 관계의 깊이는 '특무지원과(로이드, 에리, 티오, 랜디, 키아, 차이트, 세르게이) >>> 나머지(노엘, 와지, 리샤 등등)'니까요. 스토리나 캐릭터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을 제외한 시스템적인 면에서도 섬궤의 경우가 마음에 안들었던건 회차 특전이 아닌 이상 한 회차에 모든 이벤트를 볼 수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제궤나 벽궤의 경우엔 머리 좀 쓰고 서브 이벤트를 놓치지만 않으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스토리는 일단 크로스벨 내부의 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뤄지고 제국과 공화국에선 운만 띄우던 제궤와는 달리, 벽궤에서는 본격적으로 크로스벨의 국제적 입지가 다뤄집니다. 알짜배기 땅인 크로스벨을 집어삼키기 위해 동서에서 다투는 에레보니아 제국과 캘버드 공화국의 음모, 그리고 전작의 사건 해결 후 새로 시장으로 취임한 디터 크로이스를 필두로 한 크로스벨측의 대응이 벽궤의 주요 스토리입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건들을 겪으며 특무지원과의 로이드 일행은 자신들의 능력, 자신들의 한계,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이번 작의 핵심 캐릭터인 키아를 비롯해 전작에선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던 랜디, 리샤, 와지의 사연도 함께 다뤄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전에도 언급한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궤적 시리즈 중 크로스벨 궤적의 스토리를 가장 좋아합니다. 크로스벨 궤적 두 작품은 제가 지금까지 접했던 어느정도 현실을 투영하는 판타지물 중 가장 현실적인 배경에서 가장 현실적인 주인공들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펼치거든요. 두 강대국 사이에 껴서 밖으로는 자치권마저 위협받고 안으로는 온갖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는 크로스벨 자치주, 자치주 경찰의 한 부서에 소속된 경찰공무원들인 로이드 일행. 그런 입장인만큼 크고 작은 벽들에 부딪치면서도 때로는 능력적인 면에서나 권한적인 면에서나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철저히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결국 두 작품에 걸쳐서 그 벽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 뭐라해야하나, 보고 있으면 뭔가 뿌듯하달까요.
특무지원과란 입장 때문에 이 게임은 몇가지 이벤트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크로스벨 자치주 안에서 진행되며 그만큼 주인공 캐릭터들은 물론 엑스트라 NPC까지 모든 캐릭터들의 모습을 상당히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로이드 일행은 물론 NPC들, 더 나아가서 크로스벨 자치주 자체에 정이 든다고 해야하나요? 옆동네에서 만든 게임이긴 하지만 저 크로스벨의 입장이 현실적으로도 상당히 익숙한 상황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캐릭터들이 겪는 사건 하나하나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되더군요.
거기에 무엇보다 주인공인 특무지원과 일행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단순히 동료애라는걸 넘어서서 이건 아빠 로이드 엄마 에리 이모 티오 삼촌 랜디, 딸 키아, 멍멍이 차이트, 보호자 세르게이까지 해서 딱 이 일곱을 보고 있으면 그냥 가족이란 말 밖에는 떠오르는 표현이 없을 정도. 본편의 사건을 해결하는 마지막 열쇠도 결국은 특무지원과의 가족애입니다. 서로가 이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팔콤 게임에서 찾자면 영전4의 어빈 마일밖엔 안떠오를 정도입니다. 하늘의 궤적이야 사실 전작 가가브편까지의 전개방식에 가깝고, 섬의 궤적이 일단 1편은 그나마 크로스벨편과 비슷한 형태인데 캐릭터들의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보니 이정도의 느낌은 아무래도 없거든요.
제궤에 이어 1년만에 나온 후속작이고 같은 크로스벨편에 속하다보니 아무래도 많은 점을 공유하는만큼 게임 내적으로 할 말이 그렇게 많진 않네요. 조금 더 얘기하자면 같은 크로스벨이 배경이긴 하지만 제궤 시점에선 안가본 곳을 주로 돌아다니게 되므로 필드나 던전이나 대부분 새롭다, 몇몇 도전 요소에 가까운 보스전을 포함해서 전투의 난이도가 꽤 올랐다, 이 작품에서 최초로 2회차 이후에서만 볼 수 있는 보스와 이벤트가 생겼다, 나름 제대로 된 미니게임이 들어갔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BGM은 훌륭한 편이다, 스토리 분량이 대략 65~70시간 정도인데 그중 30% 가까이가 종장에 할애될 정도로 분량 조절이 이상하다, 최종던전의 미친 넓이는 이 게임이 만약 랜덤 인카운터를 도입했으면 JRPG 역사에 남을 정도로 악명을 떨쳤을 것이다, 스토리는 팬들이 계속 비꼬니까 너네도 자학하는거냐, 이정도?
아무튼 개인적으로 제로의 궤적과 함께 섬궤2 발매를 앞둔 지금 시점에서 궤적시리즈 중 가장 괜찮은 게임으로 꼽고 싶은 작품입니다. 섬궤2도 기대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섬궤2가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는 뻔하다 싶어서 최소한 스토리면에선 섬궤2가 나오더라도 여전히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고요. 거기에 섬궤2는 이 작품과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궤적 시리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한번 플레이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