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었던 소설중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아카식 그래퍼" 라고 해서 일어난 모든 역사가 영상과 글로 기록되는 능력인데
그 능력이 실제로 생겨서 2$#%^$#^$%$%^$%^ 것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똑같이 그대로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진짜 저런거를 폭도라고 말한 몇명 연예인들(아직도 방송 잘 나오고 있음).......
인간이 아닙니다
머... 나치에서 학살을 수행했던 군인들도 죄책감은 안느끼던군요... 난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권위에 순응하는 인간형들이 그렇다는데... 아마 똑같지않을까 합니다. 난 군인이고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 라고... 저런 인간들은 그냥 늙어 죽게 놔두는것도 죄가 아닐까 합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화가~!!!!!
전두환 끌어내서 능지처참시키고 가족들 자식들 모두 빵에 보내거나 사형시켜야한다.
그리고 공수부대놈들부터 지시한놈들까지 모두 형을 받아야 마땅할것입니다.
이건 모두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의 일들이고 그런자들을 용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네요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빵, 우유 건네
10월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부산에선 1058명 연행, 66명 군사재판 회부)되는 것을 끝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일단락됐다. 10·26사태 직후 공수부대 1여단과 3여단은 부산에서 철수했지만, 해병대는 남아서 계엄작전을 계속했다. 주된 작전은 ‘위민 및 선무활동’이었다.
10월27일 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한 해병대는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했다. 특히 해병대 1사단의 의전행사 담당부대인 32대대(일명 99대대)로부터 근무교대 의장식을 전수받아 시민들의 이동이 잦은 출·퇴근 및 낮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국기 게양식과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게 행진하는 해병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쯤 되자 시민들은 계엄군인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군복을 입고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열흘 전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그때부터는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부산역 주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는 박경미(64)씨는 “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서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신세를 져서, 집으로 가기 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해병대 초병에게 술과 안주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번은 바지주머니 속에 술병과 안주를 집어넣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라. 내심 ‘이게 바로 해병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당시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강민호(61)씨가 들려준 얘기도 비슷하다.
“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주둔지 관공서 여직원과의 사랑
71대대 소대장으로 계엄임무를 수행했다는 박용감(53)씨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기는 좋았던지, 오토바이 뒤에 해병대 깃발을 꽂은 채 환호하면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시민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은 병사들이 칼같이 다려 입은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2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형인 줄 알고 눈을 찌르기도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지만, 국민 앞에 서면 한없이 순한 어린 양이 됐다.”
이처럼 계엄군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평화스러운 위민활동에 해병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자랑스러움은 깊어갔다. 특히 절도 있고 패기 넘치는 해병대원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총포탄의 ‘화려한 휴가’지였다면, 부산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사랑의 ‘아름다운 휴가’지였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계엄군과 한 여성이 사랑을 꽃피워 결혼에 골인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해병대 김모 소위는 박 대통령 시해 다음날인 10월27일, 주둔지이던 부산대를 떠나 한 관공서에 주둔하게 됐다. 준수한 외모의 김 소위는 이듬해 2월 철수하기 전까지 박구일 연대장의 지침에 따라 위민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A씨를 만났다.
이후 포항으로 원대복귀한 김 소위는 외출·외박을 나갈 때마다 A씨와 만나 사랑을 쌓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김 소위의 동기생들과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한 끝에 9월말 당사자인 김 소위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2001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는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휴가’에 대해 한마디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 1진으로 부산대에 주둔한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였다. 김 소위가 소속된 7연대 71대대는 2진으로 72대대와 함께 10월26일 수영비행장에 주둔하다가 부산대로 옮긴 뒤 이듬해 2월 철수했다. 하지만 김 소위는 1진 투입 전 73대대로 배속됐다.
“계엄군 투입일에 앞서 당직근무를 섰다. 이튿날 오전 근무취침을 하려는데 중대장이 급히 찾더니 소대원들과 함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하루 종일 내무반에서 대기했는데, 밤 11시경 중대장이 불러 ‘73대대에 배속됐으니 그곳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73대대에 합류했다.”
차비 안 받는 버스 안내양
그는 “당시 소대장은 인접 중대에도 많았고, 우리 중대에도 여럿 있었는데 하필 내가 73대대로 배속돼 투입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끝내 실명을 밝히지 않은 그는 결혼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경위와 연애 스토리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서 잘하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사람들은 계엄군 투입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서 말을 맺었다.
1980년 2월 철수 전까지 4개월간 계엄군으로 부산에 주둔했던 해병대 1사단은 그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에 따라 또다시 대구(연대본부, 21대대), 마산(23대대), 부산(22대대)에 상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7연대가 해안방어부대로 이탈하고 2연대가 계엄 임무를 맡는다. 한편 광주에는 3·7·11여단 등 공수부대가 주력군으로 투입된다.
광주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 시민군의 반발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데 반해 해병대 1사단 2연대가 투입된 대구, 마산, 부산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시민들의 시위는 광주 못지않게 격렬했지만 계엄군의 대응방법이 달랐다. 정행원 2연대장은 부마항쟁 당시의 박구일 7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는 지침을 내렸다.
당시 2연대 작전주임으로 현장에 있었던 김현기 예비역 대령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국민이 돌 던지며 때린다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엄작전에 임했다”면서 “부마민주항쟁 당시 닦아놓은 해병대의 위민정신과 평소 체계적인 훈련으로 쌓은 해병정신 덕택에 큰 탈 없이 작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도 부마민주항쟁 진압 당시 톡톡한 효과를 본 무력(無力)행진이 우리의 유일한 진압방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민주항쟁 당시 집단 발포와 관련된 ‘자위권 발동’ 논란에 대해 “최근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자위권 발동’에 대한 명령과 수용 여부가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차이로 비쳐지고 있지만, 해병대에도 분명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는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우리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 ‘무적해병’이라는 명칭과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보고 ‘뉴욕타임스’ 기자가 붙인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칭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와 부산의 지형적 차이
부마항쟁 계엄작전에 참여했다는 또 다른 관계자도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해병대의 역사적 전통이 나 때문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당시 대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서 “해병대의 성공적인 진압 작전은 이를 듣고 생활하며 훈련해온 장병들이 위기 때 보여준 좋은 사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직까지 문서로 정리돼 보존되거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적은 없지만, 부마민주항쟁과 5·18계엄 당시 보여준 해병대의 위민정신은 지금도 후배 해병대원들에게 구전(口傳)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예비역들의 증언에는 자화자찬도 섞여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 육군 예비역의 증언을 들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80년대 초반 친구인 해병대 장교와 함께 부산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버스 안내양이 나한테는 차비를 받으면서 해병대 친구의 차비는 한사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야, 왜 네 차비는 안 받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멋쩍게 웃음만 짓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버스 안내양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해병대가 인기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왔다.”
10월12일을 시작으로 11월24일까지 부마민주항쟁 28주년 행사가 부산과 마산에서 성대히 열린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동일 학술과장은 광주와 달리 부산과 마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없이 항쟁이 마무리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마항쟁 당시에도 시위가 아주 격렬했다. 주요 관공서, 방송국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광주와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배경은 우선 지형적 여건의 차이다. 광주는 도로 몇 곳만 봉쇄하면 완전히 고립되고 통제된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은 바다를 등지고 있어 완전 통제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위진압에도 한계가 있다.
또한 ‘계엄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군이 투입됐더라도 시위나 저항이 계속됐느냐’ ‘진압과정에서 대치하는 쌍방이 어떤 폭력을 수반했느냐’에 따라 양상은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군 통수권자의 차이도 있다. 부마항쟁 와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된 것도 큰 변수였다. 만약 통수권자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공화국이 저물어가던 시기. 박 대통령은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에 격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의 소요사태를 시찰했다.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를 대하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10월26일 궁정동 비밀안가에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하면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훗날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결국 뒤이어 집권한 신군부는 광주에서 박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했다.
근래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민사작전이 국내외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이 우리의 민사작전 교범을 도입할 정도로 대민 및 위민활동은 한국군이 단연 뛰어나다는 게 정설이다. 1979년과 1980년 부산에서 보여준 해병대의 계엄작전은 한국군의 정신사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의 시초라 할 만하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해병대의 ‘미담’이 묻혀 있었을까, 왜 지금껏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하다. 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있다. 한 해병대 예비역 장교는 “당시 계엄군을 총지휘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이 다 특전사 출신인데, 해병대의 진압과정과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언론이 비교하도록 놔뒀겠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