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름발이 사내의 이야기
가난과 기근이라는 민족적 고통이 반도를 휩쓸던 시절,
그는 가진 것이라곤 악착같은 끈기와
어디 내놓으라 해도 꿀리지 않고
대장부와 견주어도 비견될 만한
튼튼한 다리를 가진 건장한 경상도 사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세상의 빛을 본 기쁨도 잠시,
자식복이 없어 어느새 하얗게 머리가 새어버린
중년 부부 두사람만이 큰 집에 남았고
장손 집안에 대를 끊기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태어나자 마자 어쩌면 생면부지로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종가집에
집안의 귀한 장손으로서 자라게 되었다.
애초에 젖도 떼지 않은 그 핏덩이가
헤어짐의 아픔과 고통을 알 턱이 있으랴,
후에 이 일이 자신을 길러준 양부모를
두고두고 원망하게 되리란 것을 그들도 역시
미처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차 하여 집안의 하나뿐인 장손으로서
호적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리 넉넉한 사정이 되지 못하였던
양부모는 차마 갓난 아이에게 당장 예방접종할 만큼
여윳돈이 있지 아니하였고 그리하매
100일도 채 되지 않았던 작은 사내아이는
양부모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 작은 몸으로는 이겨내지 못할 병에 앓고 있었다.
단순한 감기라기엔 지나치게 몸이 뻣뻣하였고
이윽고 다리 한 쪽이 힘을 잃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병명은 소아마비, 제 때에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
일본에서 넘어온 뇌염모기에 물린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라는 동안에
왜 자신이 절름발이가 되어야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지금처럼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하며 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어렴풋이나마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이유를 알았을 무렵엔
그래도 자식이라고 자신을 길러 준 양부모를 차마
미워하거나 탓할수도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방황하였으나
그런 사람들의 손길을 받으며 자라온 것에
마음 한 켠에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깊게 자리했다.
시장 사람들의 놀림과 야유가 반복되던 어느 날
시장통 바깥 어귀의 큰 의원이 있던 길목은 지나던 길에
뜻하지 않게도 내원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수양모와 양부의 모습을 발견한다.
두 사람이 병원 밖으로 나간 틈을 타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는 의원님의 멱살을 붙잡고
어찌 자신의 양부 양모가 그 곳에서 나오는 것이냐며
절름발이 소년은 다급하게도 따져 물었다.
냉랭한 눈빛의 의사는 일체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수양모가 심장판막증을 가지고 있으며
수술해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자신을 길러 준 수양모가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제서야 그는 미운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그 역시 부모의 사랑에 보답코자
부단히도 노력하였고 남 부럽지 않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그의 양부는 마을 어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경찰이었고
비록 아들은 절름발이라는 놀림을 면치는 못했으나
그의 아들마저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어떤 수모를 당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양부모는 적어도 그 마을에서만큼은
굉장히 인망이 두터웠고 깊은 신임을 얻는 부부였다.
아픈 와중에도 수양모는 힘겨운 몸을 이끌고
부산 시장 한복판에서 지금은 간혹 가다 보이는,
통채로 닭을 튀겨 내다 파는 일을 했다.
온갖 잔병치레를 하는 통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모가 튀긴 통닭 입맛은
진주 시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양부도 일이 끝나고 나면 시장통으로 달려와 장사를 도왔고
세 식구는 하루를 빠짐없이 부지런히도 살았다.
그런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제법 형편살이가 나아질 즈음
돌연 그의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비록 양아들의 병원비 하나 대주지 못하고
절름발이로 만들어 아들의 미움을 산 못난 아비였으나
그 시대에서는 보기 힘들만큼 깨끗하고 모범적인 경찰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가장의 자리가 없어진 집안은 빠르게 무너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