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평가론 다크나이트보다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순수악을 상징하면서 정신적으로 집요하게 배트맨을 괴롭히면서
인간의 페르소나 자체를 겉으로 드러내며 배트맨에게 존재의의를 묻는데 중점을 두었었죠.
이 과정에서 영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선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과 조커 두 캐릭터에
포커싱을 맞추며 극중 몰입감을 더했는데 (조커의 뛰어난 연기가 뒷받침됐음은 물론이구요)
일단 악역 역할의 베인은 캐릭터의 깊이나 극중 대립구도 및 이야기의 전개방향에서
큰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뜬금없는 반전과 조금은 어수선한 이야기 진행에 캐릭터가 다소 희생된 부분이 있다는 느낌도 지우기 힘드네요.
놀란 감독이 다크나이트에서는 배트맨의 정신적인 고뇌를, 라이즈에서는 육체적인 고통을 다루는게 중점이라고
밝혔던 기억이 나는데, 베인은 조커와는 달리 조금 더 '물질적인' 방식으로 베인은 배트맨을 괴롭힙니다.
배트맨이라는 히어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근간이 되는 재산을 무너뜨리고 웨인의 육체에 직접적인 피해를 줌으로써
더이상 영웅으로써 활동할 수 없도록 물질적 기반을 철저하게 빼앗았지요.
하지만 이런 물질적인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들일 뿐, 결국은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웅으로써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보기에 좋았네요.
또 이것을 시각적으로 함축한 지하 감옥에서의 라이즈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컷 중 하나였습니다.
고난이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극중 대사처럼 배트맨은 한층 더 달라져서 새로이 일어난 것이겠죠.
다만 영화 초기에 빼앗긴 재산으로 말미암아 맨몸으로 시작해 악과 대적하는 처절한 장면을 기대했는데
영화 후반부에 더 배트를 타고 날라다니며 활약하는 액션씬은 약간 허무한 감이 있었네요.
물론 시각적 효과의 볼거리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는 더 나은 선택일 수 있겠지만요.
마지막으로, 비긴즈보다 살짝 나은 수준의 영화로 그칠 수 있었던 이 영화의 가장 큰 임팩트는 바로 엔딩 부분입니다.
영화 게시판의 덧글을 보니 저스티스 리그를 암시한다, 후속편을 암시한다...는 말들이 있던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길 바라지도 않구요 ㅋ
극중 블레이크는 초인적인 힘이나 지능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바로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될 수 있겠지요.
고든을 넘어서려는 욕심을 부리다 베인에게 굴복하고 집안에만 숨어있다
다시 복귀해 결국 한컷만에 사망하는 닉슨 역시 약하고 작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을 잃고 슬퍼하는 소년에게 건넨 외투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후에 도시를 지키는 영웅을 탄생시켰듯이,
배트맨에 비해 작고 미약한 존재지만 악에 맞서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이들이 바로 영웅이지요.
비록 육체는 늙어가고 축적된 부는 영원할 수 없겠지만, 악에 맞서려는 마음이 있다면
영웅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그것이 상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꿈같은 일이 이뤄진다면, 웨인이 그러했듯이
더 이상은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가면을 써야할 필요가 없어질 세상이 오겠지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새삼 와닿는 결말이네요.
영웅이 필요했던 고담시 태초의 혼란에 얼굴을 가리고 분연히 일어나 도시를 지키던 영웅은
이제 법과 질서, 그리고 시민들 자신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 채 가면을 벗고 긴 휴식에 들어갔지만
그 대신에 이런 히어로물을 기다리는 기쁨이 하나 줄었다는게 너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