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 시스템을 통해 전체주의에 질문을 던지는 <시계태엽 오렌지>
“진취적이고, 폭력적이고, 활발하고, 젊으며 대담하고 사악해.”
그저 재미로 혼자 사는 여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난폭한 젊은이가
내무부 장관에게는 이상적인 실험의 모델이 된다.
“그는 완벽해.” 살인죄로 14년형을 선고받은 알렉스. 2년간의 지루한 교도소 생활 끝에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악인을 선인으로 바꿔준다는 ‘루도비코법’의 대상자로 선정된다.
치료소에서 몇주간의 치료만 받으면,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처벌의 이론들
1971년에 제작된 <시계태엽 오렌지>는 1995년의 영국,
당시로서는 24년 뒤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몇 가지 문제들을 제기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형벌에 관한 법철학적 논의들이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보복론과 치유론(혹은 재사회화론)의 대립이다.
교도소장은 형벌에 대한 견해 중에서 가장 고대적인 관념을 대변한다.
형벌이란 모름지기 보복을 통한 정의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나는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아.
내 생각에는 눈에는 눈이고, 이에 이야.
누가 널 때리면 받아 때려야 해, 안 그래?
그런데 정부는 왜 너 같은 못된 범죄자에게 복수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지?
새로운 견해를 따르면 그러면 안 된다는군.
우리가 나쁜 사람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것들은 너무나 구역질나게 정의롭지 못한 거야.”
한편, 죄수들을 회개시키려는 목사의 지루한 설교는 치유론을 대변한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너무나 확실하고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어떤 감옥보다 어둡고, 사람이 만드는 어떤 불보다 더 뜨겁고,
당신들처럼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로 가득 차 있고….”
물론 전혀 가망없는 시도다.
죄수들은 치유를 위한 이 신학적 협박에 커다란 트림으로 대꾸한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전혀 교화적이지 못했다.”
교화에서 기술로
범죄자를 치유하기는커녕 외려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형벌 시스템의 한계다.
실험대상을 찾으러 교도소를 방문한 내무장관은
도열한 죄수들을 사열하면서 간수들에게 이 말한다.
“범죄자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뭐가 되겠소? 범죄의 집중밖에 더 되겠소?
여기에 있는 보통의 범죄자들은 임상치료로 다루는 게 최선책이야.
처벌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당신들은 그들이 소외 처벌이라는 것을 외려 즐기는 것을 보지 않았소.”
형행의 이론은 더 인간주의적 방향으로 진화를 해도,
형벌의 효과까지 더불어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도입한 개혁이 바로 루도비코법.
인문적으로 영혼을 교화하는 게 아니라,
테크놀로지로 정신의 통제와 육체의 변경을 시도하는 방법이다.
이는 이른바 미국 CIA의 ‘MK 울트라 프로젝트’,즉 50년대에 시작하여 70년대까지 계속된
약물과 마인드 컨트롤을 통한 과학적(?) 심문기법을 연상시킨다.
치료소에서 알렉스는 매일 커다란 주사로 약물을 주입받고,
강제로 두눈을 벌린 채 폭력으로 가득 찬 영상들을 보게 된다. 약물의 영향 때문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는 폭력적인 장면에 구역질을 동반한 신체적 거부반응을 보인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메스꺼운 느낌이 들다니.
전에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보는 게 즐거웠는데.”
의사가 대꾸한다.
“폭력은 끔찍한 거야. 너는 지금 그것을 배우고 있는 거지. 네 몸이 배우고 있는 거야.”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휴머니즘의 잠재적 주제는 인간의 길들이기다. 휴머니즘의 잠재적 명제는 다음과 같다.
올바른 독서는 길들인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휴머니즘의 이 기본전제를 의문에 부친다.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목사는 알렉스가 성경책을 즐겨 읽는 장면을 보며 그가 교화되어 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알렉스는 예수의 수난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로마 병정의 역할을 맡아
예수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며 남몰래 즐거워한다.
푸코의 어법으로 휴머니즘적 기획을 가망없는 사목권력의 행사로 폭로한 뒤,
슬로터다이크가 시사하는 니체적 대안은 영화 속 내무장관의 개혁적 대발상을 연상시킨다.
“장기적 발전이 종적 특성들의 유전학적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미래의 인간공학은 명백한 형질 설계로까지 나아갈 것인가?
인류가 종 전체에 걸쳐 탄생 운명론에서 선택적 탄생 및 탄생 이전의 선택으로
방향 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휴머니즘의 기획, 즉 책 읽기를 통한 정신의 교화는
인간의 야수성을 길들이는 데 실패해왔다는 것.
따라서 이제는 유전공학을 이용해
인간의 형질을 새로 설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71년에 나온 영화가 인간의 개조에 약물이라는 화학요법을 사용한다면,
21세기에 기술적 상상력은 한층 더 무르익어 아예 분자생물학의 수준으로 내려가
유전자의 형질을 변경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파시즘과 휴머니즘
니체와 하이데거를 동원한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반(反)인간주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의 폭력도 결국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형질 설계’라는 슬로터다이크의 발상이야말로 독일 사람들에게는
나치 시절에 행해졌던 우생학의 실험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의 발언은 독일사회에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켰고,
언론에서는 그의 발상을 ‘차라투스트라 기획’이라 비판했다.
감옥의 알렉스는 빨간 완장을 차고 있다. 그는 현대의 히틀러 유겐트다.
“진취적이고, 폭력적이고, 활발하고, 젊으며 대담하고 사악해.”
폭력에서 쾌감을 느끼는 알렉스의 사디즘은 나치적 인성의 전형이다.
베토벤 교향곡과 함께 흘러가는 나치 전당대회의 모습 역시
알렉스의 인성과 파시즘 사이의 연관을 암시한다.
하지만 여기서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이런 나치 인성을 기술로 뜯어고치려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전체주의가 아닌가?
도대체 어느 것이 전체주의일까?
타인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알렉스의
타고난 야수적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 전체주의일까?
아니면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그런 인성들을 강제로 길들이는 게 전체주의일까?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스키너의 행동주의
알렉스의 치료효과를 공개하는 장면은 철학적으로 매우 풍부하다.
알렉스는 대중 앞에서 섹스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준다. 그 장면을 보고 목사가 항의한다.
“이 소년에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그는 더이상 도덕적 능력이 없는 생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장관은 대꾸한다. “우리는 더 높은 윤리적 입장에서의 동기에는 관심이 없소.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범죄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오.”
범죄를 ‘못’ 저지르는 것과 범죄를 ‘안’ 저지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
스키너의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 사람의 내면의 주관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과학적으로 관계있는 현상은 오로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외적 행동뿐.
하지만 행동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그것은 인간을 처벌과 보상으로 길들이는
생쥐 같은 존재로 환원시키는 폭력일 뿐이다.
루도비코법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물질의 조작을 통해 정신의 작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물리적 환원론이다.
물리적 환원론은 당연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인간의 행동은 물리적 술어로 기술되는 물질의 운동으로 환원된다. 휴머니즘?
그것은 인간만 혼자 물리적 세계 바깥(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에 위치시키는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에 알렉스는 교활한 미소를 띠며 또 한번 “나는 치유되었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예전에 가졌던 야수적 본성을 되찾았음을 암시한다.
그는 선택의 자유가 없는 생물에서,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원작소설과 달리,
큐브릭의 영화에서는 알렉스가 전과 다름없는 사디스트로 돌아온다.
물론 감독이 이로써 파시스트적 동물성을 긍정하는 것은 아닐 게다.
범죄를 저지를 수 없어서 저지르지 못하는 것은 도덕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지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 결론에 도달한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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