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뒤엎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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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스포) 곡성에 대한 해석 2 - 퍼옴 (2) 2016/05/16 AM 12:02


편하게 쓸려고 하다보니 말투가 좀 딱딱함. 급하게 막 써재낀거라 문장 이상해도 양해 좀 ㅇㅇ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이고 생각 과정에서 비약이 있을 수도 있는데 사실 같다 붙이는건 관객의 자유기도 하고 뭐... 그래도 최대한 억지스러운 부분은 스스로 뺄려고 노력해봤음.

일단 내가 생각할 때 곡성 주제는 인간의 원죄라고 생각한다. 곡성은 생각보다 훨씬 어쩌면 스토리 전체가 가톨릭의 모티프로 진행되는 것이고 무속신앙은 동서양 관점의 혼용을 통한 관객 혼란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화는 가톨릭 관점에서 명확한 선과 악의 대립구조이다. 하지만 근대 철학에서 옳은 행위에 대한 해석이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공리론과 의무론으로 나뉘어 왔으며 심지어는 현대 철학에 이르러 보편적 관념의 설정을 배제하는 실존주의가 나타나는 등 인간의 관점에서 선과 악의 경계와 그 판단은 항상 모순과 불확실성이 존재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한 작중 인물들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선과 악의 대립구조를 희석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인간들의 행동에서 벗어난 외지인과 무명은 자연스럽게 초월적 존재의 지위를 가진다.

종구가 처음으로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했던 소문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 무명은 종구와 그 동료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즉 인간에게 의심으로 비롯된 원죄가 있기 때문에 신은 돌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선악과 이야기 역시 악마의 하수인이라 볼 수 있는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게되는데 일련의 사건은 모두 인간의 호기심과 신의 말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무명은 예수 혹은 가톨릭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지의 관점에서도 동서양 관점의 혼용이 이루어 지는데 동양의 관점에서 하얀 소복은 귀신이지만 중세 예술 작품의 대부분에서 예수의 의복 역시 하얀색 의복을 바탕으로 주황색 천을 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명 역시 흰색 바탕에 외투를 항상 걸치고 있었고 마지막 장면에선 급기야 대사와 함깨 색채까지 예수와 동일시 한다.(아줌마의 가디건의 색깔 역시 주황색) 이처럼 흑백과 선악의 색채대비라는 클리셰를 동서양 관점의 혼용을 통해 낯설게 만들고 합리적 의심을 무너뜨리는 장치로써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난 외지인을 명백한 악마로 규정하고 싶다. 외지인의 방에 있던 염소의 머리 역시 명백한 장치라고 보여지는데 보통 서양에서 보여지는 악마의 이미지는 염소와 인간을 조합한 형상이다. 일례로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발굽과 뿔을 가지고 있는 염소와 인간을 조합한 형상이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의 말을 읊고 성흔을 보여주는 장면은 그 대상이 가톨릭의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인물이기에 그런 모습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온 인물이 다른 사람이였다면 악마는 다른 모습을 하고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부제를 그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영화의 주제를 더욱 또렷하게 하기 위한 감독의 선택 중 하나이다.

일광은 외지인과 동일인물임과 동시에 성경에서 뱀과 같은 하수인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빙의라는 현상은 동서양의 공통 분모로써 존재하며 동서양 관점의 혼용이 이루어 진다. 우선 무당이 되는 계기 중 신병은 사람 몸에 들어오려는 신이 아닌 악귀의 괴롭힘에서 비롯되는거다. 이몸에 신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악귀도 더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일광의 경우는 본래 신이 아닌 악귀에게 점철된 것이고 그것에 사로잡혀악마의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두 대상이 직접 마주치는 장면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는 반면, 무명과 외지인, 무명과 일광이 마주하는 장면에서 일광과 외부인 모두 고통스러워 하는 공통점 역시 여기서 비롯되는 것. 외지인은 폐쇄적이고 제한된 사람에게만 인지되는 반면 (외지인이 불에 타죽은 여자 집에 찾아왔을 때도 외지인을 인식한 것은 종구뿐이였다.) 대외적으로 사람들과 마주하는 역할 역시 일광에게 부여된 것이고 마지막 씬에 집에 가서 가족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마무리하는 것 역시 하수인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천만원을 강조하는 금전적 논리로 움직이는 모습 역시 예수를 팔아 넘기는 유다의 모습을 통해 악마의 하수인 역할을 보여주는 예로서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유다의 행동은 베드로가 닭이 울때까지 예수와의 관계를 세번 부정하게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일광이 딸 효진을 향해 살을 날리는 굿 역시 동시에 외지인이 진행하던 의식의 관심을 돌리며는 수단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외지인이 동시에 진행하던 굿에서 무명의 시선을 돌리려 하는 의식이지만 무명은 외지인 쪽에 등장한다. 하지만 일광의 살은 종구와 그 아내에 의해 멈추게 되는데 인간이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 종구가 끝까지 가지고 가던 유일하게 확실한 신념은 여기서 효진을 한번 살리는 데 성공하였다. 감독이 말하는 종구를 살려둔 이유 역시 종구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저 장면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광야의 유혹의 두번째 유혹의 내용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악마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 그가 너를 위해 사자들에게 명령해 그들이 손으로 받쳐서 발이 돌에 부딫치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성경까지 인용해가면서 근거를 댄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라고 반박하며 두번째 유혹을 이겨낸다.

이는 기적과 같은 쇼맨십을 통한 종교행위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다. 마지막에 닭이 3번 울리고 갔어도 (이건 뭐 너무 빼박이라...) 결말이 바뀌지 않았을거라는 감독의 말은 이걸 뜻한다고 생각한다.

하고싶은 말은 더 있는데 졸려서 글이 안써지네. 나중에 시간 나면 더 써볼게.






*출처* - DC 영화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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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랭건조    친구신청

곡성글 잘보고 있습니다.

docatto    친구신청

내용이 바로 안 와닿고 혼란스러웠던 이유가
동서양이 섞여서 그런 듯 싶네요.
감독이 좀 사람들이 두루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면 좋았는데 본인 생각대로 만든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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