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피인들은 영화의 호불호에 관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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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곡성>에 대해서 무엇이 진짜냐, 이야기의 특정 부분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그리 된 것이냐, 등등을 일일이 따지려 드는 일은 상당히 피곤하고 소모적인 행위라 생각한다.
(스포일러)
이 영화는 극중 인물들이 의심과 믿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놀음판에 끼어든 와중에, 불가해한 상황 앞에 놓인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관객도 덩달아 체험케 하려 든다. 이 영화에서 정말 대놓고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카메라'이다. 나홍진은 카메라가 처음 등장할 당시 널리 퍼졌던, 카메라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 가둔다는 속설을 영화에 적극 차용해 온다. 특히 동굴 씬에서 외지인이 악마의 형상으로 등장해 이삼을 카메라에 담을 때, 엔딩 씬에서 일광이 종구를 카메라에 담을 때, 영화는 이삼과 종구가 스스로의 의심에 몸부림친 끝에 마주하게 되는 그 극도의 무력감을 바로 카메라 앞에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극중의 카메라는 다시 나홍진의 카메라로 이어진다. 나홍진은 나름 정보를 공정히 전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케 하며 스스로 정당한 게임의 참여자로 착각케 한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가 크게 뒤집어지는 순간마다, 관객은 나홍진이 유도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판단을 고쳐 먹을 수밖에 없으며 결말에서도 결국 나홍진이 정한 결말을 납득해야만 한다. 나홍진은 이렇게 관객을 휘두르기 위해, 자신이 이야기의 큰 틀을 뒤집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일부러 어느 쪽으로 이야기를 짜맞추어도 말이 되도록 일반적인 스테레오타입과 연출의 함정을 이용해 정보를 생략 혹은 왜곡하다가, 중요한 순간에서야 연출의 함정 뒤에 숨은 또 다른 패를 까 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온전히 인지할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가지는 한계로 인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보가 생략되거나 판단된 상태에서 부족한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경험적 지식으로 채워가며 나름의 판단을 내려 이에 기반해 '믿음' 혹은 '의심'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심과 믿음의 문제는 그 출발부터 인간의 한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영화의 속성과도 맞닿아 있다. 관객은 극장 안에 머무는 동안 스크린 위에 시청각화되는 정보들만을, 그 시청각화되는 방식에 따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가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한하거나 왜곡한다면, 관객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경험적 지식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거나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다고 '착각하며' 나름의 '해석'이란 것을 확보하려 안달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결국 관객은 그 영화를 아예 부정하기 전까지는 결국 감독이 쳐 놓은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영화 속 서사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클라이맥스에서 완전히 오컬트의 영역으로 도약해 이삼과 종구에게 이 모든 사단의 배후에 신과 악마라는 절대자가 있었노라며, 인간은 신의 말을 의심하고 그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은(그리고 그 자손이 사람을 죽인) 원죄로 인해 신과 악마의 게임판 위에서 끝없이 농락당하다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노라 이야기한다. 한 편, 영화는 다시 관객의 인식적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 서사의 중요 지점마다 서사의 틀 자체를 휙휙 바꾸어 대며, 영화 서사의 배후에는 다시 영화의 모든 서사 및 관객에게 전달되는 정보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가 있었노라며, 관객은 그가 전달하는 정보들을 의심하며 영화의 모든 곡절들을 온전히 파악하려 하는 시도는 결국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노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처음부터 온전히 전달하려는 생각이 없었던 부분들에게 대해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라며 서사적 개연성 측면에서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내리는 대부분의 과정들은 결국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무익한 시도들이다. 일광과 외지인이 같이 훈도시를 입고 있었고 외지인이 효진의 실내화를 가지고 있던 와중에 무명은 효진의 머리핀을 가지고 있었고, 외지인이 예수의 성흔을 지니고 있던 와중에 무명은 닭이 두 번 울기까지 예수를 세 번 부정한 베드로의 일화를 닭이 세 번 울기까지 자신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종구의 상황으로 재현하며 '네 딸의 아비가 의심하고 사람을 죽였다'며 인간의 원죄를 말한다. 때문에 어느 쪽으로 해석을 확정지으려면 반드시 다른 한 쪽의 정보를 외면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해 무리한 방식으로 끼워 맞추어야 한다. 게다가 벼락 씬, 박춘배 좀비 씬처럼 서사적 개연성을 장르적 호기심이 압도해 버리는 장면들(위 세 씬들과 더불어 엉엉 우는 외지인 씬, 무명의 등장에 일광이 피 섞인 구토를 과하게 쏟아내는 씬에는 B급 호러 코미디의 감성을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가 잔뜩 묻어난다.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는지와는 별개로.)까지 존재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서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잉여나 흠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영화 속 서사의 과정은 그저 의심과 믿음, 그 끝의 무력감을 체험케 하기 위한 감독의 놀음판의 장치들일 뿐이며, 엔딩에 이르러서 나홍진이 제시하는 판본을 관객은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다.
서사의 구석구석을 해석해 내어 어떤 깊은 통찰에 이를 수 있는 영화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곡성>이 그러한 영화의 예인지는 의문이다. 서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보려 할수록 이 영화는 빈틈투성이로 보이기 십상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누가복음의 인용, 영화 후반부에 몰려 나오는 성경적 메타포들을 연결지어서 이 영화가 어떤 통찰을 밝히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떤 깊이 있는 메시지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그렇다고 보기엔 성경의 인용 및 은유가 너무 단조롭고 무성의하게 심어져 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에 기반한 의심과 믿음의 놀음판을 굴러가도록 하는 '동력'(클라이맥스에서 외지인과 무명 모두에게 예수의 상징 및 은유를 고르게 붙여놓는 것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이자, 카메라를 매개로 관객과 영화와 감독의 관계를 밝혀 영화가 구성된 전체 양상을 까발림으로써 관객에게 마지막으로 한 방 멕이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고 보는 편이 더 맞다고 본다.
예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제공하는 유흥이 당신에게 그리 흥미롭지 않다면, 그건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의 취향이니까. 이 영화가 질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면 그것을 비판하는 것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움직이는 기본 논리 자체를 외면하고 핀트가 어긋난 틀에 영화를 끼워 맞추려다 보면, 본인이나 보는 사람이나 피곤한 노릇이다. 데이빗 린치나 홍상수의 영화에 대고 굳이 서사적 개연성에 따라 씬과 숏들을 재구성해 보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같은 영화에서 어떤 진지한 정치 담론을 끌어내려 아등바등하는 시도는 우스꽝스럽다. 영화에 따라 그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대단한 것을 굳이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만끽하는 것도 때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마음껏 무서워 하고, 마음껏 즐거워 하고, 뭐... 그러다 감독한테 실컷 엿도 먹어 보고.
*출처* DVD프라임 날아라님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