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중앙일보를 구독하는건 아니지만
김순덕 여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기사를 클릭했습니다
역시나 소식을 알고 계셨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고인에게 명복을..
“내 자식도 피해본다고 생각하면 사회 안전해질 텐데 …”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4.20 04:15 / 수정 2014.04.20 11:34
[세월호 침몰] 씨랜드 참사 때 아들 잃고 한국 떠난 김순덕씨
뉴질랜드에 정착한 전 필드하키 국가대표 김순덕씨 가족. 이민 3년째인 2002년 막내 시현이가 태어났다.
1999년 씨랜드 화재 사건 때 잃은 큰아들 도현군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왼쪽은 둘째 아들 태현군. 사진은 5년 전인 2008년의 모습이다. [사진 김순덕]
“평생 아파할 일이니 오늘 하루 다 아파하지 말아줬으면 ….”
김순덕(47)씨의 말끝이 흐려졌다. 목이 멘 듯했다. 내내 애써 차분하게 얘기하려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동병상련의 부모들을 떠올리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던 것 같다.
김씨는 15년 전인 1999년 11월 18일 조국 대한민국을 버렸다.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었던 그는 “이 나라에 더 이상 기대가 없다. 둘째라도 온전히 키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 그의 큰아들 도현(1999년 당시 6세)군은 앞서 다섯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참극 ‘씨랜드 화재 사건’의 희생자였다. 그해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의 청소년 수련시설 씨랜드에서 불이 나 유치원생 19명 등 23명이 숨졌다. 인솔 교사들은 대부분 먼저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사고 조사에서 인허가 비리와 탈법 운영이 드러나 업자·공무원 16명이 구속됐다.
김씨와 17, 18일 두 차례에 걸쳐 통화했다. 그는 ‘태화루’의 전화를 직접 받았다. 태화루는 그와 남편 김성하(51)씨가 뉴질랜드 북섬의 도시 오클랜드 외곽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국음식점이다.
-한국의 세월호 침몰 소식은 들었나.
“인터넷 등으로 계속 뉴스를 보고 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 뉴스를 차라리 보지 말까 하다가도 자꾸 눈길이 간다. 한숨만 나온다.”(그는 통화 도중에도 자주 한숨을 쉬었다.)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죄송하다. 어린 학생들이 희생되는 대형 사고가 또 일어나 당신을 생각하게 됐다.(기자는 1999년 6월 30일 씨랜드 화재 취재 현장에서 김씨를 봤다. 그는 생존 어린이들이 대피한 인근의 여관에서 도현이를 애타게 찾아 헤맸고, 결국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통곡하다 실신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계속 반복된다. 가슴이 답답하다. 여기 뉴스에서 ‘코리아’로 시작하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눈물도 꽤 흘렸을 것 같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은 들었지만 한 번도 울지는 않았다. 눈물샘이 마른 것 같다. 너무 아프면 울음도 안 나온다.”
-뉴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우왕좌왕, 해결되는 것은 하나 없고,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것 여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씨랜드 사건 때에도 화재 원인과 피해 어린이 신원 등에 대한 대책본부의 발표가 여러 차례 혼선을 빚었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왜 이런 사고가 반복된다고 생각하나.
“여기에 와서 한국 국민은 교육을 잘못 받았고, 지금도 잘못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곳에서는 개인보다 타인이나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받는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의 그룹 과제를 부여하고, 그런 것들을 잘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한국은 나만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교육받는다. 그렇다 보니 나만 피해 보지 않으면 괜찮다는 분위기가 생겨난다. 내 자식, 내 가족만 잘살겠다고 한다.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문제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불행한 대형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변해야 한다. 내 식구, 내 자식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말 각자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죄인이라는 얘기인가.
“돌이켜보면 (아들의 죽음에 대해) 나도 잘못이 있었다. 내가 가든, 아니면 유치원 부모들 중 몇 사람을 보내든 사전에 수련회 장소를 답사했어야 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단체로 캠핑을 가거나 현장학습을 하게 되면 부모가 미리 답사를 한다. 따라가는 부모도 많다.”
-어린이나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다른가.
“이곳에서는 열두 살 때까지는 부모나 대리인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가서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 아이들이 단체로 학교 밖을 나설 때는 교사들이 안전 문제를 꼼꼼히 챙긴다. 그러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살도록 한다. 사회적 보호와 독립의 선이 명확하다.”
-그동안 한국에 와 봤나.
“이민 온 뒤에 두 번 가봤다. 지난해에도 가봤다.”
-어떠했나.
“여러 측면에서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공무원들이 많이 친절해졌다. 그런데 정말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에서 나오는 친절인지, 친절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마음에 없는 친절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도 사그라졌나.
“외국에 오니 또 다른 측면의 문제가 보인다. 나는 뉴질랜드 영주권자로 아직 대한민국 국민이다. 외국에 살고 있는 국민에 대한 보호도 정부의 주요 임무다. 그런데 한국의 공무원들은 동포에 대한 보호 의식이 떨어지는 것 같다. 뉴질랜드 정부를 보면 외국에서 자국민에게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똘똘 뭉쳐 신속히 대응한다. 우리는 늘 대처가 늦다. 국민에 대한 보호 의식의 수준이 다르다.”
-훈장을 반납하고 한국을 떠난 것에 후회는 없나.(김씨는 사고 당시 유가족들의 총리 면담 요구가 거절되자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공로 등으로 받은 훈장들을 우체통에 넣었다.)
“후회는 없다.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아픔도 많이 무뎌졌다.”(김씨는 이민 3년째인 2002년 셋째 아들 시현을 얻었다. 시현이는 세상을 뜬 큰아들 도현군을 쏙 빼닮았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으로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도현이를 보낸 슬픔을 가눌 길이 없던 때에 ‘평생 아파할 일이니 오늘 다 아파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그대로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언론이나 주변에서 무심코 던진 말에도 그들의 아픔은 더 커진다. 주변의 따듯한 말은 정말 큰 힘이 된다.”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절대로 못 느끼는게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