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월남전 기간 동안 최고로 유명한 학살 사건인 미라이 사건 당시 사망자 수가 300~500명 추산인데, 이 보다 더욱 큰 규모의 학살을 실제로 한국군이 수도 없이 벌였다면 선전거리 수집과 심리전에 필사적이던 당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그리고 현 베트남 정부가 자초지종과 학살 규모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형 사건이 여럿 터졌다면 베트남전쟁 당시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한국군 몰아내자는 운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대 사건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전여론을 지지하며 베트남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미국 언론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을 예로 들자면 미라이 학살 이후로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이미지는 완벽히 쓰레기로 전락해서 전쟁지속의 의지와 여론마저 바닥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학살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면 기밀로 남기는 것도 불가능할 뿐더러 이미 예전에 다 알려져서 이제와서 발견될 것도 없다는 거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한국군이 그런 악행을 베트남 전역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이고 다녔다면 이미 진작에 미라이 학살 사건의 여파 뺨치는 대 특종이 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몇 명의 생존자들과 기념비 혹은 추모비 이외에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될 만한 학살의 흔적은 하다 못해 유골과 전투 흔적 하나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학살이 벌어졌다는 마을 이름들은 심지어 지도에서 지명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들이거나,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출신이라는 자료 역시 자료 원본이 진짜 존재는 하는 것인지 입증조차 하지 못한다. 구수정이 밝혔다는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정작 한국군에게 누명 씌우기 위한 베트콩의 계략임이 수십년전에 밝혀 졌음에도 지금도 버젓이 사실인양 인용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쾅나이 성" 과 "쾅남성". 특히, 쾅나이 성의 경우 미군들은 그 곳이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 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쾅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 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상을 당해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가 대형 사고를 쳤었다.
쾅나이, 쾅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 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골성향이 강했다. 게다가 쾅나이 성의 경우,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은 베트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지만 증거도 없거니와, 그럼 협조해서 부비트랩 같은 거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유사 지역에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미해병 선무소대가 이 지역, 중부 동해안의 어느 촌락에서 촌락민을 돕고 숙영을 했었는데 다음날 병사 두 명이 실종됐다. 당장 난리가 났고 미군 수사대가 왔지만 촌락민들이 워낙 순종적이라서 그들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결국 실종자는 시간이 흘러 사망자로 처리된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 유해발굴 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나오면서 탐문을 해보니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이 사실을 밝혔는데, 당시 그 마을은 베트콩 마을이었고, 실종 병사 두 명은 당시 마을 처자 두 명이 해치워 땅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장소를 안내해 발굴조사 후 유해는 안장되었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참가했던 당시 파견됐던 장병들은 자신의 동료를 해치운 마을 처자가 전날까지 매우 친절했던 아가씨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먹었고 돌아가서 그 사실을 언론사에 소개해서 그 것이 기사화된 사건이었다. 그 정도로 쾅남, 쾅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비무장지대 쾅트리 성까지 지역은 베트콩이거나 베트콩 협조자인 민간인을 빼면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할 정도의 지역이었다. 이것이 파월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들 중에서, 초창기 주둔했던 베트남 동해안의 최남단 지역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다. 즉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뭔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다만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진 부분도 있으니 사실 판단에 주의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