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190 ~ 228)
자는 유상(幼常).
등애와 함께 산을 너무나 사랑한 사나이...(하지만 결과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이자 삼국지의 등장 인물으로 백미로 유명한 마량의 동생이다. 마씨 오형제 중 마량이 넷째, 마속이 막내라고 한다.
때는 서기 228년
촉의 초대 황제 유비가 사망하고도 5년이 지난 후
촉의 승상 제갈량은 5년동안 쌓은 국력을 바탕으로 유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북벌에 나섭니다.
한번에 위의 천수, 남안, 안정 3군을 얻는 잭팟을 터뜨리고 위기의식을 느낀 위도 조진, 장합 등의 용장을 파견해 1차 북벌은 본격적 전쟁에 접어듭니다.
이 때 요충지 중 하나였던 가정을 촉의 입장에선 무조건 지켜내야 했는데 하필 조운, 오의 등의 숙장들은 다른 곳을 맡고 있는 상태라 빼올 수가 없는 상태.
이 때 제갈량은 후계인재 양성을 겸해 평소 자신이 신임하던 마속을 사령관으로 삼아 가정 방위를 명령하는데......
..... 근데 마속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그리고 산에 오른 결과......
실제 부사령관 왕평은 마속이 잘못되었다고 부득부득 싸우지만
결국 마속이 고집을 안 굽히느라 일군을 떼어 산이 아닌 길목에 자신의 군을 배치했습니다. 같이 등산 안했어요.
그리하여 마속의 일군은 전멸.
그나마 산 외의 길목에 진친 왕평이 구하러 와준 덕에 목숨은 건집니다.
덕택에 처벌이 난무하는 가정 패전에서도 왕평 혼자만 승진.
그리고 그 결과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 이긴 싸움 말아먹은 게 분했는지
결국 제갈량과 조운은 황제 유선에게 표를 올려 스스로의 벼슬을 깎아 사죄합니다.
그리고 이 패전의 가장 큰 책임자 마속에겐 결국 사형이 내려지고
여기에서 읍참마속의 고사가 유래.....
는 훼이크. 도망가려다 잡혀서 사형당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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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강수진!!!
삼국지연의를 한번쯤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제갈량의 제1차북벌 당시 마속이 제갈량의 말을 어기고 산위에 진을 쳐 장합과 사마의에 의해 패하고 보급로가 끊김으로서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는 장면을 아쉬운 장면중 하나로 꼽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속의 실책으로 인하여 눈물을 머금고 한중으로 군을 돌리는 모습에 아쉬움이 가득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이었던 것은 제갈량은 왜 마속으로 하여금 제1차 북벌당시 가장 중요한 곳중 한곳인 가정을 실전경험이 전무한 마속같은 이에게 맡겼냐는 것이다.
1. 청산유수의 언변.
마속은 백미라 일컬어지는 마량의 동생. 유비가 입촉할때 형주종사의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들어간 인물. 면죽현,성도현의 현령, 월수군의 태수로도 임명되었는데 일반사람들은 그런 마속을 보고 걸출한 재능을 가진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속은 또한, 군사전략에 관한 논의를 좋아하였으며 제갈량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꾀할때 맹획등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켜야한다고 했으며 제1차 북벌당시에는 사마의를 내쫓는 계책을 사용하는 등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정사에 그러한 기록들이 확실하게 남아있지는 않는다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마속이 보여준 이런 일련의 재능을 출중하다가 생각했으며 제갈량 역시 이런 마속의 물흐르는 듯한 언변과 뛰어난 계책등을 보고 그를 신임했다.
허나 이런 마속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2. 속 빈 강정.
유비는 임종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은 그 말이 지나치게 크니 그런 그를 기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마속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유비였다.
유비는 촉을 건국하기 전,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허실을 파악하고 처신을 하는 것에 달인이었다. 공손찬이 안주의 모습이 보이자 도겸을 구원한다는 핑계로 과감히 떠나버린다. 여포에게 서주를 잃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나 그에게 종속되어버릴 위기를 느끼자 황제의 밀명을 핑계, 그리고 원술이라는 먹잇감을 노리고 조조의 품에서 떠나간다. 조조에게서 벗어났으나 그의 힘을 당해낼 수 없어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나, 원소의 성격적 결함을 깨닫고는 원소에게서도 역시 몸을 떠나 조조에게 맞서다 패하고 마침내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유비같은 처신을 보이는 이는 정세를 살피는 눈이 뛰어나고 사람의 허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수십년동안 수많은 군웅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유비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결국은 촉을 얻어 자수성가 하게된다.
이런 인물일수록 사람을 보는 눈은 대게 정확한 법.
"승상은 마속의 재질을 어떻게 보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당세(當世)의 영재(英才)입니다."
선주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짐은 이 사람을 보니 말은 잘하지만 능력이 말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크게 쓸 인물이 못 되오. 승상은 깊이 살피시오." <삼국지연의 중>
유비는 마속이 가진 결정적 결함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평소 그런 그를 신임하던 제갈량에게 죽기 전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생전에는 마속에게 중임을 맡기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죽고나서 실질적인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제갈량은 자신의 소신대로 분명 마속에게 중임을 맡길 것. 그리고 그가 중임을 맡으면서 생길 실패를 유비는 미리 직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마속은 허풍쟁이.
마속은 분명 뛰어난 인재였다. 그의 뜻은 분명 여타 인물들보다 크고 높았고 그에 맞는 지식까지 갖춘 촉에서 보기드문 인재중 한사람이다. 그러나 마속은 항상 말만 앞섰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속의 말은 꼭 실행에 옮겨진 것처럼 보인다.
바로 제갈량의 존재때문. 제갈량은 항상 그를 곁에두고 그에게 많은 것을 자문했다. 그리고 마속이 내놓은 답을 제갈량 자신이 그 실행에 옮겼다. 그렇기에 마속의 뜻이 항상 제대로 된 결실을 얻어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제갈량이라는 든든한 존재 한사람으로 인해 마속은 자신의 역량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마속의 실체는 제갈량이라는 존재가 뒤로 슬그머니 빠지면서 바로 들어난다.
제갈량은 지금껏 보여주었던 마속의 능력을 믿고 그런 마속을 1차 북벌 제1의 요충지인 가정에 파견하여 보급로를 지키게 한다. 왕평을 부장으로 삼고 위연까지 지원군으로 삼으면서까지 자신이 믿고 아끼는 제자의 능력이 십분발휘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마속은 그런 제갈량의 기대를 무참히 부셔버린다.
옛 병법책에 기술된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 치는 것 한번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구절 하나만을 믿고 산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우를 범한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국지전이 벌어지는 그 지역의 지리에 따라 변경되고 응용되어야 하는 병법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버리고 만 것. 조진과 장합이 물길을 끊고 그를 포위해버리자 마속이 이끄는 촉군은 금새 사기가 떨어져버렸고 실전경험이 전무한 마속은 이를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당황만 한채 자멸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그것이 개인의 패배로 끝났다면 다행이지만 북벌에 가장 중요한 보급로를 끊게 만들고 하늘을 찌르던 촉군의 기세마저 꺾어버려 제갈량의 6번에 걸친 북벌을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버린다.
잠시 사족을 달자면, 제갈량의 6차례(혹은 5차례)에 걸친 북벌 중 성공 가능성이 있던 것은 1차 북벌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 각종 국가고시등에서도 처음 보는 시험에서의 합격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까지 나와있는 상황.
1차 북벌은 위군이 방심한 틈을 노려 공략했고 천수등 3군을 점령하며 그 기세를 높였지만 마속의 실수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그 이후로 방비가 강해지고 촉군의 치명적인 단점을 간파한 사마의의 지공술에 말려 결국은 모든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것.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마속의 실책, 단 하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마속의 죄는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
결론.
말로는 누구나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말로는 사람을 죽일 수도, 계책을 말할 수도 있다. 허나 내뱉은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마속은 그러한 규칙을 지키지 않은 대표적인 삼국지 인물중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체신머리 없이 나불거리는 세치 혀 때문에 작게는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엇고 크게는 촉이라는 나라 자체의 명운을 바꿔버렸으니 마속의 예는 실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과묵과 깊은 생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마속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런 마속의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언변에 속은 제갈량의 인재기용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추가로 일단 마속이 두각을 드러낸 것이 남방 평정부터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주장이다. 정사를 보면 마속에 대한 기록은 마량전 끝에 꼽사리껴서 간략한 출세 과정과 기산 출병에 대해 기록된 것이 전부이며, 여기에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갈량에게 남방 평정에 대한 조언을 한 것이 마속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즉 애초에 마속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 위의 주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근거로 실제 존재하는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신뢰했다는 기록이 실제 있기에 평소 유비가 이를 우려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위의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는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 전에는 마속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한 바도 없다가 그 시점에 갑자기 마속 이야기를 꺼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선 유비가 특별히 마속에 대해서만 말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유비는 이릉대전 다음해에 병사한 것이지 이릉대전의 상처로 바로 사망하거나 한 것이 아니므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즉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마속도 언급된 것일 수 있다. 마속은 유비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했다가 기록적인 실패를 겪은 특별한 경우라서 기록에 남은 것이지, 마속만을 언급했기 때문에 마속에 대한 언급만 기록에 남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또한 마속만 별도로 언급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릉대전 이전에도 당연히 제갈량 등과 인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므로, 과거에 마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견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다가 따로 이야기할 이유가 된다.
유비는 어디까지나 마속을 크게 쓰기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니 등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황제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한 사람을 이후에 재평가해서 등용한다고 해서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실제로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보다 적임자가 없다면 당연히 쓸 수 있다.
이엄은 제갈량과 실제로 동등한 위치였다고 볼 수 없다. 이엄은 본래 유비의 부하가 아닌 유장의 휘하였으며, 유비가 죽기 직전 그를 상서령에 임명하기 전까지 그의 위치는 건위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제갈량은 형주 시절부터 유비를 보좌하여 이미 유비가 입촉하기 전부터 장사, 계양, 영릉의 3군을 진수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 당시 유비군 내에서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은 오직 관우 뿐이었던 데다가, 여기에 제갈량은 유비가 황제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승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애초에 유비의 유언으로 고명대신이 되기 이전부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를 견제할 수 있는 관우나 장비, 황권과 같은 인물들은 형주 공방전과 이릉대전에서 죽거나 위나라에 투항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이엄은 파촉의 기존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도 법정이나 유파, 황권과 같은 인물들이 그보다 먼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아 왕의 작위를 얻으라고 권유한 바가 있는데, 이는 당시 제갈량의 권력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거나 둘의 위치가 동등한 상황이었다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이엄은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을 견제하는 위치였을 뿐 마속의 기용 문제만으로 둘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뀔 만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가정이 성립되려면 먼저 제갈량의 기반이 불안한 상태여야 성립되는 법인데, 기록상으로 제갈량의 정치 기반이 불안한 상태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철Mask님의 삼국논평과 나무위키를 참고하고 사족을 덧붙였습니다.
이때가 지나면 곽회가 나타나고 곽회가 가면 등애가 나온다규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