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키 큰 노인이 죽었다. 성은 공(孔)씨, 이름은 구(丘).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의 생전의 언행을 모아 책으로 만드니 이것이 바로 논어(論語 : 말씀을 논함)이다. 그 편집자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짧지 않은 공자의 생애, 그가 했던 보석같은 말들은 너무도 많을 것이다. 그 말들 중, 어떤 말을 첫머리에 얹어야 하나? 우리 스승님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그리고 그를 따르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그런 것이 가장 잘 함축되어 있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 수많은 말 중 가장 첫머리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공부한다는 뜻으로 쓰는 학습이라는 말은 사실 그 각각의 두 글자가 의미하는 바가 약간 다르다.
배울 학(學)은, 본래 그 글자의 모양이 아이(子)가 책상(冖)에 앉아 글(文 : 爻처럼 생긴 것의 원래 글자)을 손으로 감싸쥐고(臼) 읽는 모습으로, 훌륭한 것을 본받아,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고,
습(習)은, 아기새가 날개(羽)짓을 수없이 많이(白의 자리에 원래는 百이 들어갔다고 한다.) 하며 나는 법을 배우는 모습으로, 그렇게 알게 된 것을 익혀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것이라 하겠다.
영어의 Learn과 Study의 개념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모르는 걸 알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이다. 거기다가 그 지식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 내서 내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적용시킨다. 이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배우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거다. 이 공부라는 게 꼭 책이 들어가는 학교 공부가 아니라도 자기가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 다 공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이렇게 배우고 익히고 해도 기쁜데, 거기다 멀리서 친구까지 찾아온다. 아, 이것은 더 즐겁다. 친구 싫은 사람 있을까?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아까 배웠던 것은 더욱 심화되고, 친구로 인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여기까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 장(章)의 포인트는 아마도 마지막 구절에 있는 듯 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
지금이야, 동양의 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이지만 사실 공자의 생애는 불우했다. 높은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었지만,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탐학스런 군주들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실망한 그는 똘똘한 젊은이들 가르치는 데에나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공자를 '알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게 '섭섭하다'고 뜻을 굽혀 아부를 떨었다던가, 낙망한 채 삐져서 저어~ 산 속에 콕 쳐박혀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면. 지금의 공자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그의 말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공자도 안다. 자기 말 안 들어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다.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가 아니라,
"안 되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옳으니까 한다." 가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의 공통된 정신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德)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유가의 이상적 인물인 군자(君子)다.
기쁘게 배우고, 즐겁게 사귀며,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는다.
공자는 바로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