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는 가수 데뷔 전 10년간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함
이박사의 특별한 노래와 추임새로 업계에서는 제법 인기 있는 가이드였는데
그의 노래를 들은 지방 클럽 사장이 음반 제작을 권유했고 스튜디오 녹음 2시간만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첫번째 앨범은 그당시 유통망이라던지 집계하기가 힘들지만 이박사 본인이 7백만 장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듣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소니에선 처음에 일본어 음반을 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고집이 강했음 일본말은 발음 자체가 이상하고 싫다 라고 하면서...
계약이 파기될 뻔도 했지만 히트가능성을 예감한 관계자는 어쩔수 없이 이박사 뜻대로 하기로 했다
일본에 한류고 뭐고 없던 시절에 현란한 복장을 한 한국인이 나와서 일본의 엔카 비슷한 음악을 사이키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레알 컬쳐쇼크였다
소니뮤직과 자회사 큔소니 레이블은 발빠르게 한국어 앨범을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박사가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 & 2'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
1990년 일본 최고의 테크노 그룹인 덴키그루브(DENKI GROOVE)와 함께 만든
'이박사 & 덴키그루브:열려라 뽕짝' 등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리곤 1996년 이박사는 '일본 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1년 계약이었던 이박사는 6년간 소니와 계약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당시 팬클럽 회원 8만명
오히려 일본에서는 20~30대 젊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고
일본에서 모기 살충제 CF도 찍었고
후지 tv 음악프로그램 '헤이헤이헤이'에 출연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부도칸 1만 7천석 만석을 채웠다
08년 인터뷰 당시에도 일본에서 오라고 했는데
외국은 지루하고 물가도 비싸고 젊은이들이 자꾸 알아봐서 불편해서 안간다고 대답함
1996년 이박사는 도쿄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강의도 했었다
그후 도쿄대에는 한국어 강좌가 생겼음
이후 인터넷을 통해 이박사의 일본 활약상을 본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음반을 역수입 하게되고
그는 곧 일본 활동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공식 음반을 내고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이박사의 스페이스 판타지 일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