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二. 셋칸케(摂関家) 분열
◇ 칸파쿠(関白) 의절(義絶)
~ 동생 주제에... 게다가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고위관직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는 무모하게도 형인 타다미치(忠通)의 직책인 칸파쿠(関白)가 되기를 바랬고, 그 뜻을 요리나가를 편애 하고 있던 아버지 타다자네(忠実)가 지원했다. 고립 된 타다미치는, 동생의 평범하지 않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조정을 위해 칸파쿠 자리의 양도를 거부했으며, 결국에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지엔(慈円)의『愚管抄(구칸쇼)』가 말 해주는 타다자네 & 요리나가와 타다미치의 대립의 배경이다.
[후지와라노요리나가. 계속해서 언급되는 인물이니, 잘 기억해두자]
하지만, 이는 곡필(曲筆)이었다. 요리나가는 타다미치의 양자가 되어 있었기에, 마땅히 아들이 없던 타다미치의 적자(嫡男)로서 셋칸케(摂関家) 적류(嫡流)로서 대우를 받았다. 즉, 5위에 서임된 직후에 영예직인 코노에츄죠(近衛中将)에 취임하는「5위츄죠」가 되었는데, 불과 열일곱 살이라는 사상 최고속으로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어 있었다. 요리나가의 셋칸 취임은 조정에서도 공인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를 셋칸으로 삼는다는 부친이나 동생과의 약속을 깨고, 셋칸케 내분의 원인을 만들었던 것은 타다미치나 다름 없다. 그 원인은, 코지(康治) 2년(1143)에 친아들인 모토자네(基実)가 태어났던 데에 있다.
지엔의『구칸쇼』같은 우수한 역사 철학서가, 어째서 이런 작은 실수를 저지른걸까?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지엔이 타다미치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 뿐만 아니라, 동서에서 타다미치에 관한 기술에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 상당히 많다. 호겐・헤이지의 난(保元・平治の乱)에 관해, 동서가 중요한 사료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이러한 점에는 충분히 유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셋칸케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래 타다자네, 타다미치 부자의 관계에는 미묘한 알력(軋轢)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모토자네의 탄생과 함께 타다미치가 친자식에게 셋칸을 계승시키려고 요리나가에게 셋칸 양도를 거절했던 것 때문에, 대립은 심각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큐안(久安) 6년(1150)에 요리나가가 양녀인 타시(多子)를 코노에 텐노(近衛天皇)에게 들이려고 했을 때에, 타다미치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손을 잡고 양녀인 테이시(呈子)의 입궐을 강행, 요리나가를 방해한다거나 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결정적인 파국을 맞이한다.
입궐 문제가 일어날 때까지, 요리나가는 비후쿠몬인에 대한 봉사에 열심히였기에, 오히려 타다미치 쪽이 그녀를 모멸한 것 같은 면도 있었다. 코지 원년(1142)부터 익년에 걸쳐, 요리나가는 이제 막 입후(立后) 한 토쿠시(得子)의 행차에도 항상 따랐으며, 토바인(鳥羽院)으로부터 감사인사를 받았을 정도이다. 반대로, 코지 3년 정월의 배례(拝礼) 때에, 타다미치는 황후 토쿠시에 대한 배례를 하려들지도 않았다. 국모(国母)라고는 해도「쇼다이후(諸大夫)의 딸」이었기 때문인가.... 라고 요리나가는 추측했다.
쇼다이후라는 것은, 앞서 말 한대로 4~5위의 위계(位階)를 가진 즈료(受領) 등의 중간급 귀족을 가리키는 말로, 인정기(院政期)에 인의 근신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들의 선조 대부분은, 셋칸시대(摂関時代)에는 이 계층에 속해있었다. 셋칸케의 적자이자 모친도 우다이진(右大臣) 미나모토노아키후사(源顕房)의 딸이라는 최고의 출신성분을 자랑하는 타다미치가, 국모라고는 해도 즈료층 출신인 토쿠시를 깔보는 의식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말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추측을 한 요리나가의 마음 언저리에도 비슷한 모멸의식이 있었던지라 별 차이는 없겠지만...
그런 비후쿠몬인이 칸파쿠인 타다미치를 지원한 건 무엇 때문일까? 하나는, 선술 한대로 요리나가의 양녀인 타시가 타이켄몬인(待賢門院)과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과거 코노에 텐노가 타다미치의 딸이자 스토쿠(崇徳)의 중궁(中宮)인 세이시(聖子)의 양자가 되었던 것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거기다, 타다미치가 뇨인(女院)의 지지 세력인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나 나카미카도류(中御門)와 밀접한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국모의 지원으로 테이시가 입궐한 데에 반해, 타다자네의 분주한 움직임도 있어서 타시 역시 입궐, 입후에 성공했다. 결국, 타시는 황후, 테이시는 중궁이 되었기에, 마치 미치나가(道長)의 시대 때의 테이시(定子), 쇼시(彰子)처럼 한 사람의 제왕에게 두 후(后)가 병립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궁이 황후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황후 테이시와 중궁 쇼시의 선례를 통해서도 밝혀져있다. 코노에 텐노는, 주로 타다미치의 저택인 코노에노도(近衛殿)에서 테이시와 함꼐 보내는 일이 많아져서 입궐 경쟁은 사실상 타다미치의 승리로 끝났다. 국모와 제휴를 한 것이 승리의 원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결과,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다. 결국 큐안 6년(1150) 9월, 타다자네는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와 그 미쿠라마치(御倉町)를 접수, 정규 저택과 셋칸케 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온 보물을 탈취함과 동시에, 타다미치를 의절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섭정(摂政) 자리는 인이 결정하는 만큼 박탈시킬 수는 없었지만, 후지와라 씨의 정점인 우지노쵸쟈(氏長者)와, 그에 수반되는 장원(荘園)이나 코후쿠지(興福寺)의 관리권은 요리나가에게 주어졌다. 섭정 자리를 빼앗기는 것 만큼은 모면할 수 있었지만, 요리나가는 타다미치를 대신해 셋칸케의 적류(嫡流)로 자리잡게 되었다.
익년 정월, 타다자네의 주청에 응해 토바인은 요리나가에게 나이란(内覧)을 주어, 조정 안에서도 양자를 병립시켰다. 셋칸케는 타다자네 & 요리나가가 이끄는 주류와, 인의 근신과 손을 잡은 타다미치 계열로 완전하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종래에 셋칸시대에서는, 셋칸 자리에 앉은 자가 승자였으며, 패자는 아무런 권력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칸파쿠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류의 자리를 얻어 칸파쿠와 대항 할 수 있었던 요리나가는 어떤 권력을 가졌던걸까? 당시의 셋칸케의 내부 사정을 통해 검토 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