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二. 셋칸케(摂関家) 분열
◇ 타다자네(忠実)와 타다미치(忠通)
~ 코지(康治) 원년(1142) 8월, 코후쿠지(興福寺)의 악승(悪僧) 열다섯 명이, 무츠노쿠니(陸奥国)로 유배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사형(死刑)이 없었던 당시, 유배는 최고의 엄벌이었다. 열다섯 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일제히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이상한 사태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이것을 명령 한 것은 우지노쵸쟈(氏長者)로서 섭정(摂政)의 자리에 있었던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 그들을 연행 한 것은 元케비이시(検非違使)인 무사(武士)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였다.
하지만, 타다미치의 명령이라는 것은 명목상 그럴 뿐, 실제로는 타다미치의 부친인 타다자네(忠実)의 명령에 의해 타다자네의 케닌(家人)인 타메요시가 유배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목적은 코후쿠지에서 악승들의 수괴(首魁)인 신지츠(信実)에게 거스르는 자를 숙청하는 데에 있었다.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는 유배당한 자들이야말로「법문(法文)」을 제대로 배우고 깨우친 자들이라며, 이 처치에 대해 비난했다. 타다자네와 밀접해지기 전의... 비판 정신이 투철한 요리나가다운 일기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타다자네, 타메요시, 신지츠... 이 세 사람의 연계(連係)가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院政期)의 셋칸케(摂関家)에게 커다란 특색을 지어주게 된다.
잘 알려진대로, 11세기 초두의 후지와라노미치나가(藤原道長) 아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이어진 요리미치(頼通) 아래에서도 정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셋켄케도, 고산죠 텐노(後三条天皇)의 친정(親政)과 이어진 인정(院政)의 성립과 함께 그 세력이 현저하게 후퇴한다. 특히, 요리미치 & 노리미치(教通) 형제 계통의 대립으로 인해 텐노에게 셋칸의 인사권을 빼앗겨버린 것이 가장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인정기 초기에는 요리미치의 자식인 모로자네(師実)와 시라카와가 서로 협조한 데다, 모로자네의 양녀인 켄시(賢子)가 낳은 호리카와 텐노(堀河天皇)가 즉위했기 때문에, 모로자네의 자식인 칸파쿠(関白) 모로미치(師通) 등은 시라카와를 받들어 정무를 주도한 시기도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죠토쿠(承徳) 3년(1099) 6월, 강인하기로 유명한 모로미치가 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하었고, 후계자인 타다자네가 아직 스물한 살이었기 때문에 칸파쿠직을 계승 할 수 없었고, 인(院)에 의해 칸파쿠로 보임(補任)되었던 것 때문에, 권력의 추락이 결정적이게 되었다. 케이시즈료(家司受領)의 이반(離反)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경제적인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에, 타다자네는 장원(荘園)의 집적(集積)에 고심해, 셋칸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재력 확보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인과의 확집(確執)을 낳고 말았다.
인의 근신(近臣)으로서 대두한 후지와라 씨의 방류(傍流)와의 관계도 험악해졌고, 인에 의한 법회(法会)나 말사(末寺) 등에 대한 인사 개입에 분개한 코후쿠지 악승의 강소(強訴)도, 인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호안(保安) 원년(1120)에는 시라카와인이 쿠마노(熊野) 참배 도중에 인을 제쳐두고 토바 텐노(鳥羽天皇)에 대한 입궐 공작을 감행했다고 해서, 타다자네는 사실상 칸파쿠직에서 파면되어 우지(宇治)에서 10년에 달하는 근신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는 동안 칸파쿠로서 위기에 내몰려 있던 셋칸케를 지탱 해 온 것이 적자인 타다미치였다. 그에게는, 이 궁지를 이겨낼 긍지가 있었다.
다이지(大治) 4년(1129), 칠석에 시라카와인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대신 토바인 아래에서 타다자네는 복권을 완수했다. 셋칸케에서도 딱 인정처럼 가장인 오오토노(大殿) 타다자네와, 현직 칸파쿠인 타다미치가 병존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타다자네는 정무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었기에, 잠깐동안은 양자의 관계는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텐쇼(天承) 2년(1132) 정월의 인고쇼(院御所) 배례(拝礼)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타다자네의 보행을 타다미치가 도와주는 광경도 보였다.
하지만, 점차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발단이 된 것은 첨예화 한 코후쿠지 악승들 문제였다. 그들은 토바인에 의한 다양한 개입도 있어서, 재삼 분쟁이나 대규모 강소를 반복하여, 인의 권력과 격렬하게 충돌하게 된다. 최초는 토바인의 인정이 시작된 직후인 다이지 4년 11월에 발생했다. 이때, 인의 측근 승려인 쵸엔(長円)이 키요미즈데라(清水寺)의 벳토(別当), 그리고 난토다이붓시(南都大仏師)로 임명된 것에 반발한 악승이 나라(奈良)를 방문한 쵸엔을 습격했기 때문에, 인이 파견한 케비이시에게 코후쿠지가 유린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서, 호엔(保延) 3년(1137)에는 토지(東寺)의 죠카이(定海)가 코후쿠지 벳토인 겐카쿠(玄覚)를 제치고 승정(僧正)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여러 승려들이 우지에서 타이라노타다모리(平忠盛) 이하의 호쿠멘군(北面軍)이나 여러지역의 병사들과 대치했다. 2년후에는 인의 의향으로 보임된 벳토 류카쿠(隆覚)와 내분을 야기한 악승들이, 그의 추방을 호소하며 상경을 꾀했다. 모두 인의 개입이 발단이 되었던 만큼, 인과 코후쿠지, 셋칸케의 대립을 초래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타다미치는 유효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타다자네 입장에서 보자면, 과거의 실각도 코후쿠지 문제가 원인이 되었던 만큼, 이를 묵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담하게도 코후쿠지 악승들의 수괴인 신지츠를 중심으로 사찰 내부를 통제 하려 했다. 거기다, 타다자네는 주변에 무사들도 조직하기 시작했다. 미나모토노타메요시가 그를 따르게 되는 것도 이 일이 있기 직전이라 여겨진다. 유력한 무사 없이 악승의 통제는 어려웠으리라.
오오토노라고는 해도, 일단은 권력을 실추하고 있던 타다자네의 복권, 셋칸케 내부에서의 영향력의 증대는 당연하게도 타다미치에게 초조함과 불만을 낳게 했다. 코지 3년(1144), 타다미치는 코후쿠지 악승의 영지가 충만한 야마토(大和)를 지행국(知行国)으로서 획득, 그들의 영지 검사를 강행하려 했다. 여기에 악승들은 예민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타다미치는 지행국을 야마토에서 이와미(石見)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타다미치는 굴복한 것이다.
이러한 울분이 모토자네(基実) 탄생을 기점으로 발생한 후계자 문제의 진흙탕화를 초래 한 데다,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제휴 한 요리나가에 대한 입궐 방해로 발전하여 결국에는 타다미치의 의절과 셋칸케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