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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08 (0) 2018/09/17 AM 12:25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二. 셋칸케(摂関家) 분열

 

◇ 악사후(悪左府) 요리나가

~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는, 그런 타다자네(忠実)가 형성한 조직을 계승했다. 무엇보다, 하시모토 요시히코(橋本義彦) 씨가 지적한대로, 인(院)은 이후의 정무(政務)에서 타다미치(忠通)와 요리나가를 적재적소에 맞춰 써먹었으며, 정작 타다자네 자신도 호죠지(法成寺)나 효도인(平等院)의 관리권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리나가의 입장은 크게 제약받고 있었다. 또, 토바인(鳥羽院) 또한 시라카와인(白河院)과 마찬가지로 정무의 최종 결정이 있었을 때에, 유능한 인의 근신을 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셋칸(摂関), 나이란(内覧)의 지위는 형해화(形骸化) 해 있었다. 

 한편, 타다자네는 사원(寺院) 관리권 뿐만 아니라, 지행국(知行国)도 양도하지 않고 있어, 가장인 자신에게 요리나가를 종속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는, 타다미치와 대립한 경험을 통해, 타다자네가 가장으로서의 권한의 양도에 신중해졌기 때문인데, 동시에 요리나가가 입궐 문제로 타다미치나 비후쿠몬인(美福門院)에게 농락당했기 때문에, 그 정치적인 미숙함을 통감했음을 이야기 한다. 

 요리나가라 하면, 사서오경(四書五経)을 시작으로 하는 중국(中国)의 전적(典籍)에 통달해,「일본 제일의 대학생(大学生)」이라고 까지 칭송받았던 대학자였다.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은『台記(타이키)』에도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는 중국 뿐만 아니라,「왜국(倭国)의 구사(旧事)」도 중시하고 있었다. 코지(康治) 원년(1142)의 다이죠사이(大嘗祭)에서 나이벤(内弁) 역을 담당했을 때의 일로, 10월 26일의 미소기(御禊)에 대비해 철야로 미소기의 절차를 만들었으며, 다이죠사이가 끝난 후인 21일부터 30일까지 열흘간, 침식을 잊고 다이죠사이에 관한 일기 집필에 몰두 해 있었다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집중력에는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는 그 코지 원년 연말의 일기에, 자손에 대한 훈계(訓戒)를 기록하여 자신이「漢家之経史(중국의 경전과 사서)」를 중시하고,「我朝之書記(조정의 서기)」를 경시했음을 반성하며,「왜국의 구사」를 배우라고 권하고 있다. 셋칸으로서 의식을 담당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리라. 하지만, 선술한 정치가로서의 물러터진 면을 보면, 이러한 학문이 과연 그의 정무에서 어떤식으로 활용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같은 기사에서「鷹犬(응견)・牛馬(우마)・酒色(주색)」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매나 개를 이용한 수렵이나 마예(馬芸) 등의 무예를 기피한 그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도 운명의 장난이다. 또, 주색을 금지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런 한편으로 일기에는 적나라한 남색(男色)에 대한 기술을 남기고 있어, 일기를 교과서 삼아 공부하게 될 자손에게 전한 의도도 파악하기 힘들다. 

 관직을 통한 관료적인 관계를 대신해, 주종관계 등의 인격적 결합이 커다란 의미를 갖기 시작한 당시,「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남색도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지노쵸쟈(氏長者)가 된 뒤인 닌페이(仁平) 3년(1153) 정월,『愚管抄(구칸쇼)』에서「無二ニアイシ寵シケル随身(세상에 둘도 없을만큼 사랑한 몸)」이라 칭해진... 남색 상대인 하타노키미하루(秦公春)가 죽자, 요리나가는 2월초까지 공사(公事)를 방치하였고, 타다자네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4월 21일에는 효죠(兵仗)를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성애(性愛)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한 인간적인 물러터짐,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요리나가가 사적 보복을 좋아해서 소동을 야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대로이다. 후술하겠지만, 닌페이 원년(1151), 인의 근신인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의 저택을 파괴한 사건은, 토바인의 신임을 잃는다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일찍이 타다자네가 토바인을 수행한 이에나리를 선례에 반하여 효도인 경장(平等院経蔵)으로 들여보낸 유연성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요리나가의 소동은 이후에 격화한다. 닌페이 원년 7월, 심복인 미나모토노타메요시의 셋츠료테이(摂津旅亭)를 미나모토노요리노리(源頼憲)에게 소각케 해 비난을 받았다. 익년 6월에는 난토(南都)의 살인범 추포를 위해 케비이시(検非違使)를 닌나지(仁和寺)로 파견해 동사의 승려와 분쟁을 일으켰다. 익 닌페이 3년 5월말에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우(石清水八幡宮)로 달아나 숨어있던 코후쿠지(興福寺)의 승려 겐쇼(源勝)의 종자(従者)에게 요리나가는 우마야토네리(厩舎人)를 파견하여 신역(神域)에서 살해 해버렸다. 그 직후인 6월, 요리나가의 영지 재판에 불복한 코후쿠지 승려를 카미가모 진쟈(上賀茂神社)에서 추포하여 또 다시 신역을 더럽히는 유혈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물론 요리나가의 성격도 한 몫했겠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건도 셋칸케 내부의 통제와 관계 있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타메요시의 사건은 케닌(家人)에 의한 케닌의 처벌이었고, 닌페이 2년부터 3년에 걸친 세 사건은 모두 코후쿠지와 관계가 있었는데, 특히 뒤의 두 사건은 우지노쵸쟈의 명령을 거역한 자를 강제로 추포한 결과나 다름 없다. 

 이러한 소동은, 요리나가가 복합 권문(復合権門)의 정점에 서있었음을 명시한다. 반면에, 권문을 통제하기 위해 다른 권문과의 알력(軋轢)을 고려 하지 않은 요리나가의 경직된 자세도 이야기 해준다. 대체로, 타다자네는 비슷한 분쟁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요리나가의 제재가 강제적이었는지, 아니면 통제가 불충분했는지... 어찌됐든 다른 권문의 반감을 키워, 요리나가 자신의 입장을 악화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뿐인가. 닌페이 4년(1154) 9월에는, 케닌이라 여겨진 에치젠노쿠니(越前国)의 호족 하야시 미츠이에(林光家)를 은서(恩赦)한 것 때문에 엔랴쿠지(延暦寺)의 분노를 샀고, 익 큐쥬(久寿) 2년 4월에는 만잔쥬소(満山呪詛)라는 심각한 사태를 일으켰다.

 또, 나이란이 되어 옛 의례를 부흥시키고, 위반하는 이를 엄벌에 처한 것은, 오랜 신분 질서의 부활으로 이어져, 인의 근신들의 반발을 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악사후(悪左府)」라는 경멸로 가득 한 칭호를 뒤집어쓰게 됨게 동시에, 대립하던 형 타다미치와 인의 근신들과의 결합을 초래해, 요리나가는 고립을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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