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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5 (0) 2018/10/05 PM 08:43

제 03장 -격투 끝에

 

 

一. 전투의 전개

 

◇ 야습 개시(夜襲開始)

~ 호겐(保元) 원년(1156) 7월 11일 미명(未明), 운명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텐노(天皇)의 권위도, 정치적 거래도 아닌... 각 진영이 조직한 무사의 역량으로 황위의 행방이나 공경(公卿)의 정치적 생명이 결정되게 된 것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초두의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 사가 텐노(嵯峨天皇)의 항쟁을 마지막으로, 왕권은 안정되었고, 황위를 둘러싼 다툼으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왕권의 안정이 붕괴되었고, 결국에는 황위를 둘러싼 전투가 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사가 대두한 결과가 아니다. 실제로 무가 같은 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시대(奈良時代)에도 황위는 무력으로 다퉈 결정하지 않았던가. 복잡하게 왕권을 지탱하고 있던 텐노의 미우치(身内: 외가쪽 가족)에 의한 공동 정치가 해체되고, 왕가, 셋칸케(摂関家)가 분립했다는 것, 그리고 왕가의 가장에 의한 자의적(恣意的)인 황위 계승이 실행되었다는 것, 거기다 왕가, 셋칸케에서 장원(荘園) 관리 같은 것 때문에 무력을 내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한 귀족 정권 내부의 사정이, 왕권의 동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하,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의 일기인『兵範記(효한키)』를 중심으로, 전투의 양상을 쫒아가 보도록 하자.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사토다이리(里内裏)인 타카마츠도노(高松殿)는 현재의 쿄토 시(京都市)의 중심인 카라스마 거리(烏丸通), 호리카와 거리(堀河通り)의 중간인 아네가코지니시토인(姉小路西洞院)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카모 강(鴨川) 맞은 편인 시라카와(白河) 키타도노(北殿)까지라면 도보로도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다. 시라카와로 향한 군세는 세 팀으로 나뉘었다. 최대의 병력수인 300기를 이끄는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는 니죠오오지(二条大路)를, 다음으로 수가 많은 200기를 이끄는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오오이미카도오오지(大炊御門大路)를, 그리고 100기를 이끄는 미나모토노요시야스(源義康)는 코노에오오지(近衛大路)를 따라 진군했다. 군세의 진로는 모두 대로(大路)였다. 

 시라카와 키타도노가 있는 장소는, 오오이미카도오오지에서 일직선으로 북쪽에 해당하는 카스가코지(春日小路) 끝... 즉, 카스가코지의 히가시쿄고쿠(東京極)의 튀어나온 부분에서 카모 강을 낀 대안(対岸)이라 여겨지며, 요시토모가 진군한 오오이미카도오오지에 남문(南門)이 있었다. 따라서, 키요모리의 니죠오오지는 남쪽으로, 요시야스의 코노에오오지는 북쪽으로 빠졌으며, 요시토모의 군세가 최초로 적과 조우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요시토모는 신제이(信西)들의 모략으로 골육상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올바르지 않다. 개전 결정 당시의 고양된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고시라카와 텐노 측의 무사들 중에서도 전투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런 탓에 일부러 적의 정면과 가까운 진로를 택한 것이다. 

 실전적인 야습이나 방화 전술이 채용된 배경에는,『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의 서술과 같이, 토고쿠(東国)에서 전투만 하며 살았던 요시토모의 헌책이 있었을 것이다.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에서의 타이라(平) 씨처럼, 쿄 주변을 거점으로 하는 무사들에게는 야간 전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야습을 적극적으로 행하려들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후술할『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요시토모는 시시각각 전투의 상세한 정보를 고시라카와 측에 전하고 있어, 그가 고시라카와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재삼 다뤄보겠지만, 고시라카와 텐노는 토바인(鳥羽院)의 정당한 후계자인 토구우모리히토 친왕(東宮守仁親王: 니죠 텐노)가 즉위할 때까지 임시로 즉위한 중간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토바인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들은 반드시 원활하게 계승시켜야 했던 건 아니었다. 유력한 호쿠멘 무사였던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나 타이라노모리카네(平盛兼) 처럼,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나 모리히토 친왕이 있는 토바도노(鳥羽殿)의 경호를 담당하려 고시라카와 곁으로 달려간 자도 있었다. 또, 키요모리처럼 스토쿠 죠코에게 친근감을 가진 자들조차 존재했다. 

 여기에 반해 요시토모는 사가미노카미(相模守) 후지와라노치카타다(藤原親忠)와 손을 잡고 비후쿠몬인의 장원(荘園) 확립에 협력했다고는 해도, 아내가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을 가까이서 모셨던 아츠타 구우지(熱田宮司) 가문의 수장인 후지와라노스에노리(藤原季範)의 딸이었기 때문에, 요시토모는 고시라카와 텐노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토바인이 임종한 6월 1일부터, 고시라카와으 고쇼(御所)인 타카마츠도노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선술한대로이다. 고시라카와에게 있어서 요시토모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가장 의지 할만한 무력이었다.

 또, 미나모토노요시야스도, 요시토모나 고시라카와와의 깊은 연고(縁故) 때문에, 나란히 타카마츠도노의 경호를 맡고 있었고, 제 1진에 가담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 반해, 키요모리는 최대의 무력을 통솔한 탓에 제 1진에 가담했을테지만, 원래 참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은 흔적은 없다.

 이렇게 각각의 기대를 품으며, 군세는 시라카와 키타도노를 지키는 스토쿠, 요리나가 측의 무사와 맞부딪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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