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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8 (0) 2018/10/09 AM 01:00

제 03장 -격투 끝에

 

 

一. 전투의 전개

 

◇ 패배자들의 도주

~『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도 포함해, 개전 이후에 대해서 스토쿠 죠코(崇徳上皇),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들의 모습을 묘사한 사료는 없다. 선술했듯이,『호겐모노가타리』의 서술은 미나모토노타메토모(源為朝)의 활약에 수렴(収斂)되어 있다. 그저 견뎌내며 장기전, 지구전에 임하는 작전이었던걸까? 하지만, 타메토모들이 아무리 용맹했다고 해도, 병력 수에서 우세인 적에게 차례 차례 새로운 수를 둬서는 그야말로 중과부적이라 피로가 쌓일대로 쌓인 무사들에게는 지켜낼 여력은 없었다.

 결국 방어선이 돌파당하자, 여기에 기세를 얻은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측은 병력의 수를 믿고「주변을 돌며 불을 지르기」(『愚管抄』)에 이르렀다. 포위해서 불을 지르며, 탈출하려는 적을 토멸(討滅)시킨다는 잔혹한 전투 방식은,『将門記(쇼몬키)』나『今昔物語集(콘쟈쿠모노가타리슈)』등에서 묘사된 토고쿠(東国)에서의 전투에서나 볼법한 것이었다.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주도권 쟁탈전, 전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 해준다.

 전기(前記) 카와치 겐지(河内源氏)는, 스토쿠 죠코와의 싸움이 있었던 탓에, 죠코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기 위해 특별한 싸움 방식을 취했다고 하며, 유력한 무장들 중에 전사자가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한다. 그렇다면, 스토쿠 죠코가 전선에 등장하기라도 했던걸까? 직접 싸운 것은 무사들이었기에, 거기서 살상을 피하는 전투 방식이 치러졌을 리가 없다. 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나 야시마 전투(屋島合戦), 죠큐의 난(承久の乱) 등과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도, 전투 자체로 대장급 유력 무장이 전사하지 않았던 예는 얼마든지 있다.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유력한 무장들 중에 전사자가 없었던 건,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방화 이후의 양상에 대해,『兵範記(효한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清盛等、勝ちに乗じて逃ぐるを遂う。上皇・左府、あとを晦まし遂電す。白川御所など焼失しおわんぬ。御方の軍、法勝寺にむかい検知す。また為義の円覚寺の住所を焼きおわんぬ」라고.

 여기에 따르면,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이하는 여세를 몰아 잔당 퇴치를 맡았다 한다. 하지만, 스토쿠 죠코와 요리나가는 물론이고, 주요 무장들은 전원 이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愚管抄(구칸쇼)』가 말하고 있듯이, 완전히 포위하여 방화를 한 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어쩌면, 방어선을 돌파당한 단계예서 스토쿠 죠코와 요리나가는 탈출을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부근의 수색으로 유력자는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 했다.

 덧붙여,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의 엔가쿠지(円覚寺) 주소(住所)에 대해서는 자세한 상황이 불명확하지만, 시라카와 부근에 있었던 것은 틀림 없다. 어쩌면, 젠린지(禅林寺)의 일곽(一郭)에 세이와 죠코(清和上皇)가 건립한... 같은 이름의 고간지(御願寺)와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이 쿄(京) 밖의 로쿠하라(六波羅)에다 무사단의 거점을 구축해두고 있었던 것 처럼, 본래 쿄 안의 로쿠죠호리카와(六条堀河)에 거점을 갖고있던 타메요시도, 무구(武具)의 휴대 등에 관한 제약을 받지 않는 쿄 밖의 카모 강(鴨川) 이동(移東)에 무사들의 주둔지를 설치해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승보를 접한 고시라카와 텐노가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에서 타카마츠도노(高松殿)로 돌아오자, 잔당 수색을 끝낸 키요모리, 요시토모도 다이리(内裏)로 들어와 아사가레이노마(朝餉の間)에서 전투의 양상을 보고했다. 후술하겠지만, 그날 중에 공로자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치러졌고, 칸파쿠(関白)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에게 우지노쵸쟈(氏長者)가 선하(宣下)되었다.

 이 시점에서 스토쿠 죠코, 요리나가를 시작으로, 타메요시 이하의 무사들의 행방은 불명확한데, 요리나가가 날아든 화살에 맞았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자들이 증언하고 있었다 한다. 사건의 중대함을 통해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신병 확보는 불가결했기 때문에, 그들의 도주는 무사들의 실태(失態)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스토쿠 죠코 측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이야기 해준다. 또, 요리나가의 패배를 알게 된 부친 타다자네(忠実)가 우지(宇治)에서 난토(南都)로 달아난 듯 하다는 정보도 쿄로 전해졌다.

『호겐모노가타리』에는, 무사들이 스토쿠 죠코와 요리나가를 불꽃과 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면서, 필사적으로 시라카와도노(白河殿)를 탈출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무사는 발을 묶으려 재차 공격을 가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스토쿠 죠코, 요리나가와 떨어져버렸다고 나온다. 도피행 도중, 요리나가는 선술한 미나모토노시게나리(源重成)의 동생인 시게사다(重貞)가 쏜 화살을 목에 맞았다.『구칸쇼』는, 뺨을 관통했다고 나와있다. 어찌됐든 중상을 입었으나 치명상은 되지 못 하여, 측근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 전장을 벗어난 요리나가의 소식은 오래도록 불명인 채였다. 그의 그후가 판명된 것은, 21일이 되어서이다.

 한편, 요리나가와도 떨어지게 된 스토쿠 죠코는 2일 뒤인 13일, 닌나지(仁和寺) 오무로(御室)에 있던 친동생 카쿠쇼호츠 친왕()에게 투항하기에 이르렀다.『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타메요시, 이에히로(家弘) 일족들과 함께 뇨이 산(如意山)에 올랐다. 그곳에서 항복을 결의한 스토쿠 죠코는 타메요시와도 헤어져, 산 속에서 출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는 출가에 의해 치천의 군주(治天の君)의 자리를 단념했다는 것과, 고시라카와 텐노에 대한 공순(恭順)의 뜻을 보여, 유배 같은 최악의 사태를 회피하려 했을 것이다.

 무사들도 각지로 숨어들었지만, 16일에 타메요시가 요시토모에게로 출두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무사들도 연이어 투항하게 된다. 친족을 의지해 처형 같은 최악의 사태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스스로 출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은 가혹했다.

 단 한 사람... 타메토모만은 투항하지 않았다. 타메토모가 추포된 것은 전투로부터 한 달 이상이 경과한 8월 26일의 일이었다. 오우미노쿠니(近江国) 사카타(坂田) 부근에 숨어있던 타메토모는, 불우하게도 미나모토노시게사다에게 추포되어 쿄로 연행되었다. 익 27일에는 다이리로 연행되었고, 고시라카와 텐노가 은밀히 구경하러 갔다.『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병의 요양으로 인해 소재지가 판명되어, 목욕탕에서 벌거 벗고 있었던 것을 사로잡아버렸다 한다. 종속한 권문(権門)이나 왕권의 붕괴와 함께 항복한 타메요시 이하와, 친제이(鎮西)에서 실전을 거듭하며 왕권도 상대화(相対化)한 자력구제(自力救済)의 세계에서 살아온 타메토모와의 차이가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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