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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9 (0) 2018/10/10 AM 12:36

제 03장 -격투 끝에

 

 

二. 패배자의 운명

 

◇ 죠코(上皇)의 유배

~ 스토쿠 죠코(崇徳上皇)는 13일에 닌나지(仁和寺)의 카쿠쇼 법친왕(覚性法親王) 앞에 출현하여, 당시 토바 이궁(鳥羽離宮)에 있던 카쿠쇼에게 보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칸펜호무(寛遍法務)의 낡은 방으로 들어갔다. 미나모토노미츠마사(源満政 = 源満正)의 혈통을 이어받은 시게나리(重成)가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명령을 받아 수호(守護) - 실질적으로는 감시를 맡았다. 사누키노쿠니(讃岐国)로의 유배를 명령받은 것은, 그로부터 10일 후의 일이었다. 

 실무 관인에 지나지 않았던 타이라노노부노리(平信範)는「今夕、入道太上天皇、讃岐国に移し奉らる。兼日、公家御沙汰あり」라며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죠코의 유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 비참한 유배를 경험한 죠코나 텐노를 다수 알고 있다. 따라서, 스토쿠 죠코의 유배를 가리켜 놀라는 일은 없다. 그런데, 유배를 당한 선례라 하면, 나라시대(奈良時代)인 텐표호지(天平宝字) 8년(764), 에미노오시카츠의 난(恵美押勝の乱)으로 쥰닌 텐노(淳仁天皇)의 아와지(淡路) 유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니, 실로 400여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벽두(劈頭)인 코닌(弘仁) 원년(810),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는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마찬가지로, 동생인 사가 텐노(嵯峨天皇)와 황위를 다투다 거병하였고, 사카노우에노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들의 무력(武力) 앞에 어이 없이 굴복했다. 이 사건으로 헤이제이 죠코는 출가하는 선에서 용서를 받았고, 그런 탓에 정들었던 헤이죠쿄(平城京)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었다. 선례가 중시되었던 당시, 스토쿠 죠코는 이 헤이제이 죠코와 같은 처우를 예상했으리라 생각된다. 출가하여 좋아하는 와카(和歌)나 읊으면서 헤이죠쿄 외각에 있는 사원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사누키 유배는, 스토쿠 죠코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했다. 사형이 치러지지 않았던 당시, 쿄(京)로부터 본인을 말살하는 유배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 없었다. 어째서 출가를 허락받지 못 하고 유배라는 엄벌이 강행되었던걸까? 

 출가했다고 해도 인정(院政)은 가능하다. 또, 왕가의 적류(嫡流)이자 유력한 황자(皇子)도 있었던 스토쿠 죠코가,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의 죽음 등의 비상사태가 일어난 결과, 인정을 행할 가능성은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발적으로 황위에 오른... 권위가 모자란 고시라카와 텐노 입장에서 보자면, 스토쿠 죠코라는 위험요소를 배제하는 데에는, 그를 완전하게 말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사형을 처하기 어려웠던 당시, 가장 엄격한 처벌이었던 유배형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대의 유배에는 나라시대까지와는 다른 의미도 첨가되었다. 헤이안쿄는 영구적인 왕권의 소재지임과 동시에 더러움으로부터도 격리된 청정의 땅이었다. 쿄로부터 키가이(畿外), 시치도(七道)에 이르는 거리에 따라 이테키(夷狄), 케가이(化外)의 땅과 가까워지게 된다. 쿄를 벗어난다는 것은 당시의 황족, 귀족에게는 기피해야 할 일이었기에, 즈료(受領)들 조차 현지 부임을 회피하고 모쿠다이(目代)만을 파견하고 본인은 재경(在京)하는 식의 요임(遙任) 형태를 띄는 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런 쿄로부터 왕권의 중심이 되었어야 했을 인물이 방출당했다. 이 이상의 굴욕이 있을 리가 없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스토쿠 죠코가, 깊은 비탄에 빠져있었던 것은 당연하다.『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는 세상을 저주하는 무시무시한 스토쿠 죠코의 모습이 묘사되게 된다. 그는 귀경을 요구했지만 실현되지 못 함을 알고, 자신의 혀를 씹어 그 피를 섞은 먹으로 오부대승경(五部大乗経)을 필사하여「我願ハ五部大乗経ノ大善根ヲ三悪道ニナゲウチテ、日本国ノ大悪魔ト成ラム」라는 저주의 말을 쏟아내어 스스로 텐구(天狗)의 모습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고시라카와의 왕권을 뒤흔든 헤이지의 난이나 겐페이 쟁란(源平争乱)이 연달아 발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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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쿠가 죽은 뒤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스토쿠를 스가와라노미치자네, 타이라노마사카도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악령으로 꼽게 되는데...

 

 하지만, 최근의 야마다 유지(山田雄司) 씨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의 스토쿠 죠코는 억울한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여겨진다. 적막한 와카 등을 보면, 허전함이나 비탄하는 느낌은 있지만, 적어도 고시라카와나 조정에 대한 극도의 원념을 느끼게 하는 건 없다고 한다. 적어도 구원은 받았다고 생각했던걸까.

 그의 연구에 따르면, 안겐(安元) 2년(1176)에는 고시라카와 텐노의 총비(寵妃)인 켄슌몬인(建春門院)을 시작으로,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의 양녀이자 코노에인(近衛院)의 중궁(中宮)이 되 쿠죠인 테이시(九条院呈子) 등... 고시라카와나 타다미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차례 차례로 죽었고, 거기다 익년에는 다이리(内裏)를 다 태워버린 쿄의 대화재「타로쇼보(太郎焼亡)」,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 등의 대사건이 발발해, 고시라카와의 왕권이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호겐모노가타리』에서 보이는 오부대승경의 존재가 화제에 오르게 되어, 스토쿠의 원령(怨霊)이 도량(跳梁)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고시라카와의 권위의 불안정함, 본래의 정당한 치천의 군주(治天の君)가 되었어야 할 스토쿠에 대한 동경(憧憬), 추모가 현재화(顕在化)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스토쿠의 측근인 후지와라노노리나가(藤原教長)가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호겐의 난에서 스토쿠와 함께 시라카와도노(白河殿)에서 농성, 출가하긴 했지만 히타치노쿠니(常陸国)로 유배되었다가, 오호(応保) 2년(1162)에 귀경을 허락받았다. 그런 노리나가는, 안겐 연간(1175~77)에 스토쿠, 요리나가(頼長)의 악령(悪霊)을 신령(神霊)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리하여, 공전의 혼란을 스토쿠의 원령이 한 짓이라 보는 설이 나돌게 되고, 고시라카와나 조정을 저주하면서 죽은... 무시무시한 스토쿠상(像)이 만들어져 갔을 것이다.

 스토쿠는 총비이지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모친인 효에노스케노츠보네(兵衛佐局)들과 함께 8년의 세월을 사누키에서 보냈으며, 귀경의 바람도 이뤄지지 못한 채로, 쵸칸(長寛) 2년(1164)에 세상을 떠났다. 닌나지에서 승려가 된 시게히토 친왕은, 부친보다 먼저인 오호 2년(1162)에 불과 스물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가의 적류였던 스토쿠의 황통(皇統)은 단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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