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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1 (0) 2018/10/11 PM 11:46

제 03장 -격투 끝에

 

 

二. 패배자의 운명

 

◇ 타다자네(忠実)의 유폐(幽閉)

~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와 함께, 그를 지원해온 부친 타다자네(忠実)도 당연히 어떠한 처분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난이 일어나기 직전인 8일에는, 요리나가와 나란히 타다자네에게도 장원(荘園)의 무사를 동원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또, 요리나가의 무력(武力)이 되어준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나 코후쿠지(興福寺)의 악승(悪僧) 신지츠(信実)는, 모두 타다자네의 케닌(家人)이기도 했다. 타다자네도 같은 죄가 성립된다면, 타다자네가 관리해온 막대한 장원은 몰관(没官)당하게 되며, 셋칸케(摂関家)의 경제 기반은 붕괴될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타다자네도, 그리고 적대하다 승자가 된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도, 당연히 회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다뤘다시피, 타다자네는 요리나가의 패보(敗報)를 듣자마자 즉시 우지(宇治)에서 나라(奈良)로 달아났다. 우지에 머물러 있다가는, 죄인으로서 강제로 체포되고, 장원의 몰관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다자네는 난토(南都)에서 코후쿠지의 악승들에게 보호받으며 대책을 강구할 시간을 벌고 있었다.『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진판(尋範)이나 신지츠 같은 호겐의 난(保元の乱)으로의 참전을 꾀한 타다자네, 요리나가파의 악승들이 모여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여기에 대고 거병할거라는 의혹을 씌웠다 한다.

 그런 타다자네의 곁을 빈사상태에 빠진 요리나가의 사자 토시나리(俊成)가 방문한 것은『兵範記(효한키)』에 따르면 13일의 일이었다. 호겐의 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호안(保安) 원년(1120), 타다자네는 시라카와인(白河院)에게 칸파쿠직(関白職) 파면을 명령받아 10년에 달하는 우지에서의 칩거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요리나가가 태어난 것은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우지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요리나가의 성장은, 이 땅에서 실의에 빠져 지냈던 부친 타다자네의 마음을 지탱해주었다. 그리고, 요리나가는 형인 타다미치의 양자로서 셋칸의 후계자가 될 것을 약속받았다. 친자식의 탄생으로 약속을 어긴 타다미치를 의절하면서까지, 타다자네는 요리나가에게 우지노쵸쟈(氏長者)로서의 자격을 주고, 셋칸의 지위에 올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 요리나가의 마지막 대면을 각하한 타다자네의 마음 속 고뇌는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선술한 카스가 진쟈(春日神社)의 명벌(冥罰)을 받은 자에 대한 거절에 있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셋칸케를 보전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바로 여기에, 타다자네가 요리나가의 대면 신청을 뿌리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정은 발빠르게도 11일에 타다미치를 우지노쵸쟈로 삼는다는 선지(宣旨)를 내렸다. 여기에 대해, 노부노리(信範)는『효한키』에「新議出来す。珍重きわまりなし」라 기록하고 있다.「珍重」라며 기쁘게 말하고는 있지만, 선례를 중시했던 당시,「新議」가 바람직한 사태였을 리가 없다. 사실, 타다미치는 길일(吉日)에 받고자 한다며 수락을 거부했던 것이다. 

 우지노쵸쟈는 셋칸케의 가장(家長)이 결정해왔다. 실제로, 큐안(久安) 6년(1150) 9월, 타다자네는 타다미치에서 요리나가로 교체시키려 했다. 그런 요리나가는 모반인, 부친인 타다자네도 같은 죄라 여긴다면, 우지노쵸쟈의 임명권은 텐노에게 이행될 수 밖에 없었다. 이전부터 셋칸케의 자립성의 후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주목받아온 것도 당연하다.

 타다자네로부터 타다미치에게 처음 접촉이 있었던 것은, 15일이다. 타다미치는 그 서장을 조정에 제출하여, 타다자네의 입장을 변호했던 듯 하다.『호겐모노가타리』에서는, 신제이(信西)들이 신병 인도를 타다미치에게 강요하여, 타다미치는 부친을 유배시킬 거라면 자신은 칸파쿠직을 사임하겠다며 저항했다 한다. 필시, 타다자네의 처우를 둘러싼 언쟁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기술일 것이다. 

 17일에 여러 나라의 코쿠시(国司) 앞으로 보낸 윤지(綸旨)에는, 타다자네가 또 다시 장원으로부터 군병을 동원하려 하고 있으며, 요리나가의 장원과 마찬가지로, 타다자네의 장원도 수공(収公: 조정이나 바쿠후가 영지를 몰수하는 것)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타다자네는 이미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타다자네는 호겐의 난 이전부터 요리나가의 일당으로 취급받고 있어, 난이 일어난 이후에 난토로 달아났기 때문에 중립을 인정받지 못 했다고 보는 코치(河内) 씨의 견해는 커다란 착각이다. 또, 영지의 아즈카리도코로(預所) 중에서, 공경(公卿) 이외의 아즈카리도코로는 배제하고, 코쿠시가 수습하게 했다는 것, 우지노쵸쟈인 타다미치가 관리하는 장원은 제외되었지만, 타다미치의 지행(知行) 이전은 원래의 기능을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 각각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이에 따라, 우지노쵸쟈에 따라오는 장원은 타다미치에게 반환되었고, 타다미치는 아무 말 없이 텐노의 명에 따라 우지노쵸쟈 자리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아즈카리도코로에 관한 처치는 장원의 관리자로서 아즈카리도코로의 지위에 있던 무사, 악승 등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했다. 셋칸케령(領)을 관리, 지배해온 폭력 장치가 해체된 것이다. 다음에 말하게 될테지만, 타메요시 이하의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케닌인 무사들은 모두 처형당했기 때문에, 이미 무사 계급인 아즈카리도코로는 부재(不在)인 상태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처치는, 셋칸케령의 지배 질서를 크게 혼란하게 만든다.

 18일에는 죄인인 타다자네로부터 몰관된 우지의 영지와 효도인(平等院)이 윤지에 의해 타다미치에게 주어졌다. 무사 출신인 아즈카리도코로 개역(改易)에 이어, 셋칸케령의 처분마저도 텐노의 명령으로 이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독자적인 경제 기반과 무력을 앞세운 셋칸케의 자립성은 완전히 부정되게 된다. 타다미치는 장원을 회복하였으나, 셋칸케의 지위는 크게 추락한 것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항목에 맡겨두기로 하고, 나아가서 사태의 경과를 다뤄보려 한다.

 20일, 타다자네의 장원 목록이 타다미치에게 발송되었고, 본래의 처분을 최근에 개변(改変)한 장원... 즉, 타다미치의 영지이면서도, 큐안 6년(1150)에 있었던 의절로 인해 요리나가에게 주어진 장원과, 타다자네가 관리하고 있던 카야노인령(高陽院領)인 장원이 타다미치에게 헌상되었다. 타다미치와 타다자네의 공작이 효과를 내어, 타다자네는 처벌을 면제받았고, 그 장원이 타다미치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셋칸케령의 태반은 죄다 타다미치 손에 넘어갔고, 요리나가의 장원만이 몰관되었다. 23일에는, 타다자네파를 대시내 타다미치파의 장관들을 보임하는 만도코로쿠다시부미(政所下文)가 발급되었다.

 타다자네는 27일에 죄명 선하(罪名宣下)를 면했다. 공식적으로 중립을 용인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사랑한 우지나 난토에서의 생활도 허락받지 못 했고,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라쿠호쿠치소쿠인(洛北知足院)에서의 유폐 생활이었다. 그곳에서는, 후술할 니죠(二条)의 외척인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와의 교류나, 손자인 모토자네(基実)들의 내방이 있긴 했지만, 이미 타다자네가 정무(政務)와 관련되는 일은 없었다. 당시를 되돌아본 담화집(談話集)인『富家語(후케고)』를 남기고,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일어난 뒤인 오호(応保) 2년(1162)에 85년의 길고 파란으로 가득 찬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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