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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4 (0) 2018/10/16 AM 12:04

제 03장 -격투 끝에

 

 

三. 승자들의 명암

 

◇ 싯세이(執政) 신제이(信西)

~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를 옹립, 토바인(鳥羽院)의 장례를 도맡았고,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는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작전을 용인하여 승리를 가져다주고, 정적(政敵)들에게 가차 없는 처치를 강구한 남자. 그것이 바로 신제이(信西)이다. 신제이야 말로 호겐의 난 이후 정무(政務)의 리더나 다름 없었다. 그는 낮은 신분인 인(院)의 근신이면서도 정치의 중추를 파고 들었던 만큼, 정계의 흑막, 책사 같은 평가가 주어져 있다. 일단은, 그 실상(実像)을 다뤄보고 싶다.

 신제이는 후지와라(藤原) 씨 중에서도 방류(傍流)인 난케 사다츠구류(南家貞嗣流) 출신으로, 속명(俗名)은 미치노리(通憲)라 한다. 대대로 다이가쿠노카미(大学頭)를 계승한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인 사다카네(貞兼)가 젊은 나이에 살해가 의심 되는 변사(変死)를 하게 되면서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단념하고 토바인에게 접근, 인노쵸(院庁)의 실무를 담당하는 호간다이(判官代)에 취임한다. 하지만, 인의 근신의 중심적인 가문은 고정되어 있어 승진의 한계를 통감한 미치노리는, 텐요(天養) 원년(1144) 7월에 출가한다.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며,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와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 것은 이 직전의 일이었다.

 이 출가는 결코 세속을 버린 게 아니라, 반대로 신분의 벽을 초월하는 행위였다. 그는 닌페이(仁平) 원년(1151) 5월, 토바인의 밀칙(密勅)을 받아 육국사(六国史)를 이을 국사(国史)『本朝世紀(혼쵸세이키)』의 편찬을 시작하게 되는데, 발군의 학재(学才)를 살려 학문, 문화면에서 토바인을 보임해, 그의 신임을 얻어 갔다. 

 제 1장에서도 말했듯이, 당시의 인의 근신은 크게 두 종류로 구별되었다. 즉, 대체로 대국의 즈료(受領)를 역임하여 인에게 경제적인 봉사를 행하는 대국즈료계와, 다이죠칸(太政官)의 고급 관료인 벤칸(弁官)이나 텐노의 측근인 쿠로도카미(蔵人頭)를 역임하여 텐노, 인의 정무를 다루는 등... 정무의 중추에 관여하는 실무관료계이다. 전자는 인의 메노토(乳母)의 연고자 등이 많아, 능력보다도 인의 총애로 대두한 자들이 많았다. 후술할 노부요리(信頼)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에 비해 후자는, 직무의 성격상 유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심이 된 것은 후지와라 홋케(北家)의 방류인 타카후지류(高藤流)에서 배출한 시라카와인의 근신 후지와라노타메후사(藤原為房)의 계통이다. 특히 타메후사의 차남인 아키타카(顕隆)는 시라카와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인의 정무 결재를 보임, 제 1장에서 말한대로「밤의 칸파쿠(関白)」라 불리울 정도였다. 낮동안에 칸파쿠를 대신해 쿠교기죠(公卿議定: 회의)에서 의논된 내용을 인이 결재할 때, 아키타카가 자문을 받아 그 의견에 따라 정무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셋칸(摂関)의 인사 등을 좌지우지 한 예도 적지 않다. 토바인의 인정기에 들어서면서, 그 지위는 적자인 아키요리(顕頼)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큐안(久安) 4년(1148), 아키요리가 죽자, 그의 아들인 미츠요리(光頼), 코레카타(惟方)가 아직 젊었다는 게 신제이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그는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이후, 중요 정무에 대한 자문, 중개 등에 신제이와 그의 적자이자 타카시나 시게나카(高階重仲)의 딸을 모친으로 둔 토시노리(俊憲)가 활약하게 된다. 특히 그들은 인과 나이란(内覧) 요리나가와의 정무 중개를 독점하고 있어, 인의 신임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실무관료계 인 근신의 제일인자로서 정무의 중추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제이가 토바인의 장례식을 집행하고, 호겐의 난의 참모역을 맡은 배경은 여기에 있었다. 

 신분에 관계 없이, 유능한 자를 중요한 정무에 참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셋칸시대(摂関時代)와 다른 인정기의 특질(特質)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신제이 대두의 원인과, 인정의 인재 등용이라는 적극적 측면을 볼 수 있다.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신제이는, 윤 9월 18일자로 다섯개 조(条)의 새로운 제도를 발표한다.「九州の地は一人の有なり(아홉 주의 땅은 한 사람의 것이니) -九州의 땅이라는 것은 큐슈지방(九州地方)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본 전국을 의미하지만- 로 시작되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을 강조한 새로운 체제의 안목은 장원(荘園) 정리에 있었다. 신제이는 조속히 기록소를 설치하여 장원 정리와 다이다이리(大内裏) 재견에 착수한다. 호겐의 난으로 동요한 왕권의 권위 재건과, 전란에 말려든 수도, 쿄의 정비라는 목적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기록소의 장관인 죠쿄(上卿)에는 적자인 토시노리의 악부(岳夫)이자, 신제이와는 사돈 관계에 있던 칸인류(閑院流) 출신의 사다이죠(左大将)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 그리고 차관인 벤(弁)에는 토시노리가, 타메후사류 출신인 후지와라노코레카타나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마사요리(源雅頼)들과 함께 취임한다. 무력한 고시라카와 텐노를 옹립했으면서, 신제이는 이 기록소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정무를 전개한다. 익년에 실현된 다이리 재건은, 그야말로 그의 실무 능력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유감 없이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제이는 자식들에게, 연이어 중요한 지위를 주었다. 호겐(保元) 3년(1158)에는 토시노리에 이어, 토시노리와는 친형제 사이인 사다노리(貞憲)도 벤칸으로 기용되었다. 벤칸은 좌우의 다이츄쇼벤(大中小弁)과 곤노벤(権弁) 한 사람, 총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두 사람이 형제지간이었다는 것은, 선술한 타메후사의 아들 아키타카와 형인 타메타카(為隆)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제이는 실무관료로서 타메후사류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런 토시노리는 황태자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의 사범역(師範役)인 토구우가쿠시(東宮学士)에 취임하여, 그의 측근이 되었다. 

 한편, 고시라카와 텐노의 메노토인 키노 2위(紀二位)... 즉, 후지와라노쵸시(藤原朝子)가 낳은 자식인 후지와라노시게노리(藤原成憲), 나가노리(脩憲)는 대국의 즈료(受領)로서 활약하게 된다. 특히 시게노리는 호겐 2년에 사쇼죠(左少将)를 겸임한 데다,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를 대신해 하리마노카미(播磨守)에 취임, 고시라카와 텐노의 측근으로서 대국 즈료의 정점에 섰다.

 호겐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커다란 발언력을 갖게 되고, 고시라카와 텐노, 비후쿠몬인, 모리히토 친왕 쌍방과 손을 잡은 데다, 자식들은 실무관료, 대국의 즈료로서 커다란 지위를 차지한다. 신제이 이치몬(一門)의 위세는 그야마로 다른 인의 근신 가문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특권을 잃은 사람들의 반발이 커져가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또, 아무리 유능하다고는 하나, 일개 인의 근신에 지나지 않았던 신제이의 싯세이(執政)가 실현된 배경에는 치천의 군주(治天の君)의 부재, 셋칸케의 무력화라는 문제가 관계하고 있었다. 이하, 난 이후에 있어서 왕가와 셋칸케의 상황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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