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MYPI

☆잉여인간☆
접속 : 3387   Lv. 39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82 명
  • 전체 : 2408744 명
  • Mypi Ver. 0.3.1 β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7 (0) 2018/10/21 AM 12:14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一. 정계의 세력지도

 

◇ 신제이(信西)와 노부요리(信頼)

~ 인(院)을 정점으로 하는 왕가와 셋칸케(摂関家), 이 양대 권문(権門)이 병립(並立) 해 온 것이 인정기(院政期)의 기본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양자는 분열되고, 해체되면서 이 정치력은 추락했다. 종래에, 치천의 군주(治天の君)에 종속 해 왔던 인의 근신들이 자립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에서의 정무(政務)의 특색이다. 전장에서 말한대로, 그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신제이(信西)였다. 하지만, 그 역시 본래는 중급 귀족 출신인 인의 근신에 지나지 않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호겐의 난이 일어난지 불과 3년 뒤에,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타하라(田原)에서 자살을 할 정도로 내몰리고만다. 

 여기서, 일단은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관여한 주요 인물의 입장이나 세력을 개관(概観)해 보도록 하자. 선술했듯이, 신제이가 한 사적(事績)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이리(内裏)의 재건이었다. 호겐(保元) 2년(1157) 10월 22일, 새롭게 조영(造営)된 다이리의 여러 덴샤(殿舎) 조영에 대한 상으로, 즈료(受領)들에 대한 서위(叙位)가 치러졌다. 여기서 새로운 주역이 되는 일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추진자가 된 신제이의 이치몬(一門) 중, 장남인 토시노리(俊憲)는 사쇼벤(左少弁), 5위 쿠로도(蔵人)였는데, 그는 장원(荘園) 정리, 다이리 재건의 중심 기관인 기록소(記録所)의 벤(弁)으로서 활약하여, 재건을 실행한 중추를 담당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타카시나 시게나카(高階重仲)의 딸을 모친으로 둔 동생 사다노리(貞憲)도 쇼나곤(少納言), 효부곤노쇼유(兵部権少輔)라는 실무관인(実務官人)이었는데, 임시라는 명목으로 정 5위하를 얻었다. 구체적으로는 불명확하지만, 재건에 관여한 직무를 담당해 상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에 반해, 고시라카와(後白河)의 메노토(乳母) 쵸시(朝子) 소생인 시게노리(成憲)는, 토토우미노카미(遠江守)로서 쿠로도의 숙소를 조영하여 그 역시 정 5위하가 되었다. 그의 친동생인 나가노리(脩憲)는 미노노카미(美濃守)로서 후궁(後宮)인 코키덴(引徽殿)을 조영, 종 5위상에 서임되었다. 인의 근신은, 즈료도 경험하긴 했지만, 주로 벤칸(弁官), 쿠로도노카미(蔵人頭) 등을 역임하는 실무관료계통과, 오로지 대국의 즈료를 역임하는 대국즈료계통으로 크게 구별된다. 이러한 구분은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전자인 타메후사류(為房流)에서 즈료 중 최고봉인 하리마노카미(播磨守), 이요노카미(伊予守)가 된 자는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의 아키타카(顕隆)의 동생인 치카타카(親隆)를 제외하면 보이지 않으며, 스에시게류(末茂流), 요시카도류(良門流), 미치타카류(道隆流) 등의 대국즈료계에서 벤칸을 배출한 예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신제이의 자식들 중, 시게나카의 딸을 모친으로 둔 자들은 전자의, 쵸시에게서 태어난 자는 후자의 경력을 거치게 된다. 이치몬에서 쌍방의 성격을 구유(具有)한 것은 이 신제이의 일가가 처음이었다. 시게노리는 익년 8월,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가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로 천임(遷任) 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받아 대국인 하리마(播磨)의 쿠니슈(国守)로 취임하게 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치몬 전체를 보고 있으면, 사실상 공경(公卿)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신제이 밑에서, 실무관료, 대국즈료로서 네 명의 자식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신제이와 대립하게 되는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의 이치몬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 노부요리는 무사시노카미직(武蔵守職)에서 벗어나 정 4위하 사콘곤노츄죠(左近権中将)의 지위에 있어, 공경 자리도 머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익년, 그는 산기(参議)의 반열에 올라, 단번에 곤노츄나곤(権中納言)으로까지 승진하게 된다. 타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씨의 지적대로, 공경 승진이 있었을 때에 정 4위하인 채로 산기에 취임한 것은 실무능력을 평가받았다는 증거이기에, 노부요리가 결코 무능하지 않았음을 이야기 해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그의 이치몬이 어떤식으로 승진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그는 숙모의 자식이자 숙부인 마사타카(雅隆)가 급사한 뒤에 무츠노카미(陸奥守)가 되는 히고노카미(肥後守) 미나모토노쿠니마사(源国雅)가 호쿠로(北廊) 조영으로 정 5위하로 서임되었다. 그리고 동생이자 무사시노카미를 계승한 노부토키(信説)가 토로(東廊)를 조영해 종 5위상에 서임되었다. 

 노부요리의 이치몬에서는 즈료를 졸업하여 공경을 목전에 둔 노부요리 이외에, 두 사람의 즈료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 이외에, 이미 병이 들었던 건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무츠노카미 마사타카가 있었기 때문에. 신제이의 이치몬과 거의 동격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 씨의 분석에 따르면, 지행국(知行国)이 2~4개국이라는 것이 인정기의 셋칸케나 스에시게류 등의 유력한 인의 근신 가문의 시세였다고 한다. 양자의 입장은 거기에 필적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무사들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신고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