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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38 (0) 2018/10/22 AM 01:40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一. 정계의 세력지도

◇ 겐페이(源平)의 격차

~ 이때, 다이리(内裏)의 중심인 시신덴(紫宸殿)을 조영(造営)한 것은 쿄(京)나 궁중의 건설을 담당해온 슈리직(修理職)의 장관인 슈리노다이후(修理大夫) 후지와라노타다요시(藤原忠能)이며, 그는 정 3위에 서임(叙任)되어 있었다. 시신덴의 배후에 있어 그 다음 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지쥬덴(仁寿殿)을 조영한 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의 상으로 대국(大国)인 하리마(播磨)의 즈료(受領)가 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였다. 무엇보다, 그는 그 상을 적자(嫡男)인 시게모리(重盛)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시게모리가 정 5위하에 서임되어 있었다.

 키요모리는 당시 정 4위하에 있었는데, 한 단계 위인 정 4위상은 승진을 제촉해야 할 경우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서임되는 위계(位階)여서, 그것을 뛰어 넘어 종 3위로 승진이 되면 공경(公卿)의 반열에 오르는 만큼, 아무리 키요모리라 해도 간단하게 허락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적자의 위계를 올리자... 그가 자신에게 내려진 상을 자식인 시게모리에게 양도한 사정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키요모리는 공경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익년에는 즈료 중 최고봉인 하리마노카미도 사퇴하고 다자이후(大宰府)의 사실상의 장관이라 할 수 있는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로 서임되었다. 다이니(大弐)는 일단 차관급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곤노소치(御帥)와 다이니가 동시에 임명되는 경우는 없었다. 곤노소치가 있으면 다이니가, 또 다이니가 있으면 곤노소치가 각각 임명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요모리는 다자이후의 실질적인 장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위에는, 3위 공경이 취임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공경의 자리가 머지 않았던 것이다. 정 4위에 이르러 3위를 목전에 두고 죽은 부친 타다모리(忠盛)의 숙원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도 목전에 둔 것이다.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이치몬에서는, 그런 키요모리의 동생 세 사람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먼저 소시(宗子)에게서 태어난 요리모리(頼盛)가 후궁(後宮) 중 하나이자 츄구우쵸(中宮庁)가 있는 죠간덴(貞観殿)을 건조하여 종 4위하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형인 키요모리의 뒤를 이어 아키노카미(安芸守)가 되기도 했다. 이어서, 키요모리의 동생이자 요리모리에게는 이복 동생에 해당하는 노리모리(教盛)가 인메이몬(陰明門)을 건립하여 5위하에 서임되었다. 그는, 호겐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관되게 아와지노카미(淡路守)라는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츠네모리(経盛)가 후궁의 시게이샤(淑景舎)를 조영하여 종 5위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세 헤이시의 선조인 사다모리(貞盛)와 연고가 있는 히타치(常陸)의 즈료였다.  

 형제가 네 나라의 즈료를 독점하는 이치몬은 그 외에는 없었다. 호겐의 난에서는 열심히 고시라카와를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토바인의 인정기 때에 높은 정치적 지위를 쌓아, 그럭저럭 승리에 공헌한 것이 그 입장을 강화시킨 것이다. 거기다, 익년에는 시게모리가 토토우미노카미(遠江守), 차남인 모토모리(基盛)가 야마토노카미(大和守)로 취임하여, 세력은 한층 더 확대된다.

 여기에 반해, 카와치 겐지(河内源氏)로 눈을 돌려보면, 여기서 이름이 보이는 건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단 한 명뿐이다. 수가 적은 이유는, 호겐의 난으로 이치몬 대부분이 처형당했기 때문에 당연했는데, 당주인 요시토모의 위계는 정 5위하, 이는 키요모리의 적자인 시게모리와 동등한 지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에 시모츠케노카미(下野守) 요시토모가 담당한 것은, 주요한 덴샤(殿舎)가 아니라, 호쿠로... 즉, 다이리 북측의 복도 뿐이었다. 

 공경을 목전에 둔 키요모리를 필두로 네 사람의 즈료를 내세운 헤이시 이치몬에 비해, 카와치 겐지에서는 요시토모 한 사람만이 즈료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도 키요모리의 자식과 동등한 위계를 가진 데에 지나지 않았다. 양자의 경제력은 물론이고, 정치력의 격차는 역력했다고 할 수 있다. 선술한 호겐의 난 이후의 은상 문제도 포함해, 호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대해서는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성립된 뒤에 작성된『愚管抄(구칸쇼)』나『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의해, 타이라노키요모리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가 대등한 입장에서 대항했다는 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그러한「겐페이는 대등하다」는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위계나 즈료의 수와 정치력은 별개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정치, 경제적 역량으로 말하자면, 속된 말로 헤이지의 난의 중심 인물이라 여겨지는 네 사람 중에 신제이(信西), 키요모리, 노부요리(信頼)가 동격이고, 요시토모만 다른 물에서 노는 격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을 전제로, 그들의 인간관계를 검토해보고 싶다. 

 덧붙여, 다른 무문(武門)으로는, 미노 겐지(美濃源氏) 출신인 이즈모노카미(出雲守)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가 세이로(西廊)를 조영하여 그로 인해 받은 상을 자식인 미츠무네(光宗)에게 양도한 예가 있는 정도다. 미츠야스는 토바인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의 중심 중 한 사람으로, 딸이 토바인의 총애를 받은 뒤로 위계가 현저하게 상승해, 정 4위하에 도달해있었다. 따라서, 키요모리와 같은 사정으로 자식에게 위계를 양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치몬의 즈료는 한 사람, 담당한 개소도 세이로인지라, 위계상으로는 키요모리와 동등하다고는 해도, 정치, 경제적 역량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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