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4장 -새로운 싸움
二. 타도 신제이(信西)
◇ 反신제이파・니죠 텐노의 측근
~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은 통상적으로 인(院)의 근신인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 그리고 무사인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대립으로 인해 야기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실은 신제이 타도에 협력한 귀족이나 인의 근신도 다수 존재했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노부요리는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외척인 다이나곤(大納言) 츠네무네(経宗), 토바인(鳥羽院)의 총신(寵臣)이었던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의 셋째 아들인 에치고노카미(越後守) 나리치카(成親), 외숙부이자 니죠 텐노의 메노토(乳母)의 자식이었던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들을 동료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동서에 따르면, 곤노츄나곤(権中納言)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 무사들 중에서는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 등이 노부요리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동서에서는 보이지 않지만,『公卿補仁(쿠교부닌)』에 따르면 지부쿄(治部卿) 후지와라노미츠타카(藤原光隆)도 이 병란에 노부요리 측으로서 연루되어 해임되었다. 관여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反신제이파가 꽤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反신제이파의 성격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자. 호겐(保元) 3년(1158)에 있었던 양위(譲位)에 의해, 토바인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니죠 텐노가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아직 열다섯 살 소년이었던 데다 후견인인 비후쿠몬인(美福門院)도 정치력이 모자랐다. 한편, 중간다리였다고는 해도,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도 아버지 인이었기에 일단은 인정(院政)이 개시되었고, 그런 그의 근신 집단도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해, 신제이파에도 니죠 텐노와 고시라카와인의 각 측근이 병존(併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인물들 중, 경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츠네무네, 코레카타는 물론 니죠 텐노의 측근이었다. 그들은 고시라카와인의 인노쵸(院庁)의 쿠교벳토(公卿別当)로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즉시 인의 근신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논외로 치자. 예를 들어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가 토바인의 인노쵸의 쿠교벳토였듯이, 당시까지의 쿠교벳토의 모습을 보면 그들 대부분은 형식적인 존재였다. 헤이지 원년 5월 당시, 고시라카와인의 인노쵸 쿠다시부미(下文)에 따르면, 나이다이진(内大臣)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 다이나곤 후지와라노시게미치(藤原重通) 이하 열다섯 명의 쿠교벳토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다이나곤 이하의 공경을 중심으로 전원이 혜택을 받는 형태로 망라한 것으로, 시라카와인(白河院), 토바인의 인노쵸의 쿠교벳토와 비슷한 성격이라 생각된다.
노부요리와 나란히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 되는 게 바로 츠네무네다. 그는, 시라카와인과 대항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칸파쿠(関白) 모로미치(師通)의 동생인 다이나곤 츠네자네(経実)의 아들에 해당한다. 부친인 츠네자네는 시라카와인의 인정기(院政期)에 활약한 공경인데,『中右記(츄유키)』의 기주(記主)인 후지와라노무네타다(藤原宗忠)에 따르면, 술을 좋아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난 이들을 초빙해 술김에 이웃에 돌팔매질을 일삼는 인간이었다. 어느 시대든 이런 사람은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츠네무네는 부친을 닮지 않아,「조정의 정무를 잘 수행하고 고실(故実)에도 통달해 있었다(公事ヨク勤メテ職者ガラ)」고 한다. 다만, 무력을 좋아해서 강제적인 행동이 잦았다는 점은 부친과 똑 닮았었지만...
츠네무네는 츠네자네의 넷째 아들이었는데, 형들이 일찍 세상을 뜨거나 출가하는 이도 있어 적자(嫡男)로서 대우를 받았다. 모친은 후지와라노킨자네(藤原公実)의 딸... 즉, 타이켄몬인(待賢門院)과 자매지간에 해당했으니, 스토쿠 텐노(崇徳天皇), 고시라카와 텐노와는 사촌형제지간에 해당했다. 스토쿠의 재위 중에는 순조롭게 승진해 정 4위 사츄죠(左中将)에 이르렀으며, 에이지(永治) 2년(1142)에는 코노에 텐노(近衛天皇)의 쿠로도노토(蔵人頭)가 되었는데, 산기(参議)로의 승진은 큐안(久安) 5년(1149)으로 7년이나 걸렸는데, 이는 스토쿠의 퇴위가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던 듯 하다.
이러는 동안, 누이동생인 이시(懿子)가 사다이진(左大臣)인 미나모토노아리히토(源有仁)의 양녀로서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훗날의 고시라카와)의 아내가 되었고, 코지(康治) 2년(1142)에 모리히토 친왕을 낳았다. 이윽고 큐쥬(久寿) 2년(1155)에 코노에 텐노가 죽은 뒤 토바인의 후계자로서 황태자가 된다. 츠네무네는 모리히토 친왕의 생각지도 못 한 즉위로 인해 외척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구칸쇼』에 따르면, 유능한 정치가였던 츠네무네는,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에 유폐당한 타다자네(忠実)로부터 정무 등을 배워, 타다미치(忠通)로부터 셋칸(摂関)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셋칸케(摂関家)가 분열, 쇠퇴하고 있던 당시, 칸파쿠 모로자네(師実)의 손자이자 텐노의 외척이었던 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셋칸 승진을 꿈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신제이나 노부요리보다는 신분이 높았기에, 정무를 주도하고자 하는 강한 야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츠네무네와 비교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칭해졌던 코레카타는, 실무관료로서 유명한 타메후사류(為房流) 출신인 곤노츄나곤 아키요리(顕頼)의 차남이다. 누이동생이 노부요리의 모친이고, 노부요리의 동생인 무사시노카미(武蔵守) 노부토키(信説)는 사위에 해당해, 인척관계를 통해 노부요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모친은 니죠 텐노의 메노토인 후지와라노토시타다(藤原俊忠)의 딸... 즉, 코레카타는 니죠 텐노의 메노토고(乳母子)였으며, 황태자 시절에는 토구우다이죠(春宮大進), 고시라카와인의 쿠로도노토를 거쳐, 호겐 3년 8월의 니죠 텐노의 즉위와 함께 산기로 승진했다.
『구칸쇼』에「コトニ鳥羽院モツケマイラセラレタリケル惟方」라 나와있는 것 처럼, 토바인의 특별한 배려로 코레카타는 모리히토 친왕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또, 선술했듯이,『古事談(코지단)』에는 빈사상태의 토바인이 코레카타에게 유언을 남겨 스토쿠를 자신의 유해와 대면시켜서는 안 된다고 전하도록 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집안의 차남이었으면서도 토바인의 측근으로서 두터운 신임을 얻었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는 니죠 텐노의 측근으로서 형을 능가하는 야심을 품었을 가능성도 높다. 또, 정무 보좌를 담당한 타메후사류로서 니죠 텐노의 측근임을 자부했던 만큼, 신제이가 정무를 주도하고, 그의 자식인 토시노리(俊憲)가 니죠 텐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데에 강한 적개심을 품었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미나모노토미츠야스는 미노 겐지(美濃源氏) 출신의 무장으로, 헤이지의 난이 일어난 당초에 타하라(田原)로 달아난 신제이를 추포하여 참수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바인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딸이 인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인의 장례에서는 입관 역인(入棺役人)을 맡았을 정도의 근신이 되어 있었다. 호겐의 난에서는 일관되게 토바도노(鳥羽殿)에서 모시고 있던 비후쿠몬인을 경호하고 있었고, 그녀의 충실한 무력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양자인 니죠 텐노의 측근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니죠 텐노의 측근들 중에서 가장 충실하고 중요한 무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여, 그의 형인 미츠노부(光信)의 아들인 미츠모토(光基)도 난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