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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3 (0) 2018/10/28 PM 11:45

제 04장 -새로운 싸움

 

 

二. 타도 신제이(信西)

 

◇ 反신제이파・고시라카와의 측근

~ 反신제이(信西)파의 중심이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였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전에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에게 접근해 있었고, 후지와라노코레카타(藤原惟方)와는 숙부, 조카 관계에 있었지만, 호겐의 난이 일어난 후에는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와의 소동 사건의 전말을 통해서도 명시되듯,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어, 인의 친누이인 토시(統子)의 코고구우노콘노스케(皇后宮権亮)라는 자리에 취임하는 등... 고시라카와인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그가 反신제이파의 주도권을 얻은 것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라고 하는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무력(武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칸파쿠(関白) 모토자네(基実)를 매제로 삼아 셋칸케(摂関家)의 무적 기반(武的基盤)이 된 것도, 노부요리의 무문(武門)이라는 성격을 명시해준다. 거기다 셋칸케의 후견인이 되는 것으로, 그들의 권위를 이용해 정무를 주도하고자 하는 야심을 싹틔웠을 것이다. 신제이와의 대립 원인은, 선술했듯이 관직을 둘러싼 분의(紛議)는 아니었다. 어쩌면, 정무의 주도권 탈취가 그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의 정치적 구상은 거병 이후의 행동을 통해서도 확실해진다. 

 노부요리의 검이 된 이가 미나모토노요시토모였다. 요시토모는 호겐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고시라카와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으며, 노부요리와는 무사시(武蔵)나 무츠(陸奥)에서 오래전부터의 친분도 있어 행동을 함께 한 것이다. 물론, 음모에 가담하여 관위(官位)의 승진을 촉진시키겠다는 야심은 있었을테지만, 거병의 목적은, 노부요리를 보좌하여 신제이를 타도하는 것에 있었지, 헤이시(平氏) 또한 타도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노부요리의 맹우(盟友)인 나리치카(成親)로 말하자면, 안겐(安元) 3년(1177)에 벌어진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에서 고시라카와와 함께 헤이시 타도에 대한 음모를 계획했다고 하여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愚管抄(구칸쇼)』에「院ノ男ノオボヘニテ」라 나와있듯이, 고시라카와와는 남색관계(男色関係)에 있었다. 난 이후에 니죠 텐노(二条天皇)와의 대립을 보더라도, 난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일관되게 고시라카와인의 근신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누이동생 중 한 사람이 노부요리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는 것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누이동생이 타이라노시게모리(平重盛)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나리치카는, 그 토바인(鳥羽院)의 근신이자 비후쿠몬인의 사촌형제인 이에나리(家成)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츄나곤(中納言) 츠네타다(経忠)의 딸이다. 카가노카미(加賀守) 타카시나 무네아키(高階宗章)의 딸을 모친으로 둔 이복형 타카스에(隆季), 이에아키(家明)가, 부친의 입장을 계승하여 비후쿠몬인에게 접근했던 것과는 입장을 달리 하고 있다. 스에시게류(末茂流)의 방류(傍流)였던 탓에, 형들과 뜻을 달리 하고 있었으리라. 난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아직 스물두 살, 정 4위하로 대국 즈료(大国受領)인 에치고노카미(越後守)라는 지위에 올라 있었다. 마지막까지 노부요리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으나, 나이도 젊어서 노부요리에게 종속적인 입장에 있었다 여겨진다.

 모로나카(師仲)는 명문인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에 속하는데, 그의 선조는 사다이진(左大臣) 토시후사(俊房)였다. 호리카와 텐노(堀河天皇)의 외척으로서 발전한 것은 그의 동생인 아키후사(顕房) 계통으로, 토시후사류는 에이큐(永久) 원년(1113)에 발생한 토바 텐노(鳥羽天皇) 암살 미수 사건에 관여하여 실각했다. 모로나카는 이 사건이 일어나고 3년이 지난 뒤에 태어나, 헤이지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는 마흔네 살을 맞이한 장년이었다. 모친이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의 뇨보(女房)였기 때문에, 타이켄몬인의 전성기에는 스토쿠 텐노 밑에서 승진을 거듭했지만, 스토쿠의 양위와 함께 관위는 정체, 고시라카와가 즉위하자마자 쿠로도노토(蔵人頭), 산기(参議)을 거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일어난 해 4월에 곤노츄나곤(権中納言)으로까지 승진했다. 이 경력을 생각해보면, 고시라카와의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덧붙여,『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는, 노부요리가 후시미츄나곤(伏見中納言) 미나모토노모로나카를 언급하며 후시미에 틀어박혀「馬のはせひきに身をならはし、力わざをいとなみ、武芸をぞ稽古し」고 한다. 즉, 모로나카의 후시미 영지에서 노부요리가 무예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사실이라 친다면, 노부요리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마예(馬芸)를 연마했다는 뜻이 되는데, 그 자신의 훈련도 해가면서 쿄(京) 주변에 영지를 가지지 않은 요시토모가 토고쿠(東国)로부터 상경시킨 군세를 숨겨주어 몰래 훈련시켰을 가능성도 높다. 직전까지 정변(政変)이 감지되지 않았던 이유는, 모로나카의 공적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모로나카도 마지막까지 노부요리와 행동을 함께 한다. 하지만,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자신도 나름대로 큰 야심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헤이지모노가타리』에 나와있듯이, 노부요리에 대한 종속적인 면이 강했으리라 생각된다. 

 미츠타카(光隆)는 곤노츄나곤 후지와라노키요타카(藤原清隆)의 적자로, 모친은 코노에 텐노의 메노토인 후지와라노케시(藤原家子)이다. 대표적인 인의 근신 가문인 요시카도류(良門流)의 당주로, 헤이지 원년 당시, 고시라카와인의 인노쵸(院庁)의 4위 벳토(別当)를 담당하는 인의 근신이었다. 난의 주모자인 노부요리와 연루되어 처벌받았는데, 노부요리 이치몬(一門)과의 밀접한 관계를 알려주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난이 일어났을 당시, 서른세 살, 정 4위하 엣츄노카미(越中守) 겸 지부쿄로, 공경의 지위를 목전에 둔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 난 이후의 처벌은 관직에서의 해임 뿐이라,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닌 듯 하다.

 이렇게 보면, 주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건 노부요리와 츠네무네, 코레카타 등인데, 反신제이라는 움직임 자체는 고시라카와의 측근, 니죠 텐노의 측근을 초월해있던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들을 통해 생각하면, 인사(人事)나 혼담(縁談) 같은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게 신제이 타도의 원인이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폭 넓은 신제이 타도의 움직임이 생겨난 건 어째서일까? 다음에는 그러한 점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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