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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4 (0) 2018/10/30 AM 12:18

제 04장 -새로운 싸움

 

 

二. 타도 신제이(信西)

 

◇ 정변(政変)의 배경

~ 反신제이(信西)파에 가담한 면면을 보면,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외척인 츠네무네(経宗)나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출신인 모로나카(師仲)를 제외하면,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인정기(院政期) 이래의 대표적인 인(院)의 근신 가문 출신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시모토 요시히코(橋本義彦) 씨에 따르면, 인의 근신의 대표적인 가문은 타메후사류(為房流: 타카후지류), 스에시게류(末茂流), 미치타카류(道隆流), 요시카도류(良門流), 타카시나(高階) 씨로 모두 다섯 가문이었다. 이들 중, 타메후사류 출신은 코레카타惟方, 스에시게류 출신은 나리치카(成親), 미치타카류 출신은 노부요리(信頼), 요시카도류 출신은 미츠타카(光隆)가 신제이 타도에 관계한 자들로 등장하고 있다. 

 즉, 타카시나 씨를 제외한 네 개 가문으로부터, 反신제이파 참가자가 나온 것이다. 덧붙여, 타카시나 씨로부터는 시라카와인의 인정기 초기의 대국 즈료(大国受領)였던 타메이에(為家), 타메아키(為章) 부자나, 겐페이 쟁란기(源平争乱期)에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근신으로서 활약한 야스츠네(泰経)가 나오게 되지만,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당시에는 세력이 미미해서, 유력한 인의 근신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커다란 세력을 갖고 있던 전통적인 인의 근신 가문 대부분으로부터, 反신제이파가 나타났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의 근신 가문과, 새롭게 떠오르는 인의 근신 가문인 신제이와의 대립을 추측케 한다. 전장에서도 다뤘듯이, 신제이는 대대로 타메후사류가 세습해온 인의 정무 결재를 보임하는 실무관료계파의 일인자의 자리를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 말기에 획득하게 되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정치에 어두운 고시라카와인의 정무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거기다 그의 적자인 토시노리(俊憲)는 토구우가쿠시(東宮学士), 쿠로도노토(蔵人頭)로서 오랜동안 니죠 텐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어, 정무 결재의 보좌역이라는 입장은 이대로 가다가는 니죠 텐노 아래에서 토시노리에게 계승될터였다. 이렇듯, 인, 텐노 쌍방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것이 두 파벌의 측근들로부터 反신제이파를 낳게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신제이 부자가 2대에 걸쳐 정무결재의 보좌역을 맡게 된다면, 그 지위는 두 번 다시 타메후사류에게 돌아오는 일이 없어지고, 신제이의 혈통으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다. 또, 호겐의 난 이후에 토시노리, 사다노리(貞憲) 형제가 나란히 벤칸(弁官)에 취임했는데, 이것은 타메후사의 자식인 아키타카(顕隆), 타메타카(為隆) 이래에 처음 있는 일로, 이 당시에는 타메후사류에서도 볼 수 없던 인사였다. 이미 벤칸 임용에 대해서도, 신제이 이치몬(一門)은 타메후사류를 능가하는 권위를 띄기에 이르렀다. 신제이 이치몬은 타메후사류의 권위를 부정해, 특권을 빼앗게 된다. 타메후사류로부터 커다란 불만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제이와 쵸시(朝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즈료로서도 활약하고 있었다. 시게노리(成憲)는 호겐 3년에 대국인 하리마(播磨)의 즈료가 되었고, 동생인 나가노리(脩憲)도 미노노카미(美濃守)라는 즈료층 지위에 있었다. 이렇듯 눈에 띄는 진출이 대국 즈료령 계통의 인의 근신들의 불만을 키운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즉, 신제이 이치몬의 급격한 대두는, 특권적 지위를 쌓고, 지금까지 그 지위에 안주해있던 인의 근신 가문에게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흥 인 근신인 신제이의 대두가, 전통적인 인 근시 가문으로부터 특권을 빼앗아 갔고, 여기에 대한 반발이 광범위한 신제이 타도의 움직임을 낳게 된 원인이었다. 이러한 反신제이라는 물결을 배경으로, 무력(武力)과 셋칸케의 권위를 배경으로 한 노부요리, 텐노의 외척인 츠네무네, 텐노의 측근이자 정무 보좌역인 코레카타들이 중심이 되어, 신제이 타도와 정치 주도권 탈취를 목표로 한, 무력에 의한 정변(政変)이 야기 되었다.

 이러한 경위는, 헤이지의 난이 호겐의 난에 의한 왕가, 셋칸케의 해체와, 인의 근신 가문의 자립에 의한 정치적 혼미의 소산(所産)임을 명시해준다. 

 한편으로, 정쟁(政争) 밖에 있던 유력자도 존재하고 있었다. 신제이와 인척관계를 맺고, 칸인류(閑院流)의 중심에 섰던 나이다이진(内大臣) 킨노리(公教), 타메후사류의 적자이자 곤노츄나곤(権中納言) 자리에 있었던 미츠요리(光頼), 스에시게류의 적자이자 종 3위 사쿄다유(左京大夫)인 타카스에(隆季), 타카스에의 동생이자 비후쿠몬인(美福門院), 햐치죠인(八条院)과 가끼이 지내던 쿠로노카미(内蔵頭) 이에아키(家明), 그리고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등이었다. 신제이의 협력자였던 킨노리는 물론이고, 유력한 인의 근신 가문의 적류(嫡流)인 사람들도 反신제이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적류였던 탓에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어 신제이에게 강한 적개심을 갖지 않았으며, 인이나 텐노와도 특별하게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어, 정무의 주도권에 대한 야심도 없었다. 근신 가문의 서자(庶子)들이었기 때문에, 신제이에 대한 불만을 품음과 동시에, 왕권과 밀착하여 야심을 품고, 난의 주모자가 된 것이다. 

 덧붙여, 키요모리는 신제이의 자식인 시게노리와 그의 딸이 약혼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는『愚管抄(구칸쇼)』의 기술이 중시되어, 통상적으로는 신제이파로 여긴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노부요리의 자식인 노부치카(信親)를 사위로 들이기도 했다. 키요모리의 무력과 재력은 쌍방으로부터 주목받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은 원래 스토쿠 죠코(崇徳上皇)와 가까웠던 것도 있어서 고시라카와인, 니죠 텐노 두 파벌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거기다, 본래 정무의 중추에 가담하지 않은 무문(武門)으로서, 정계(政界)의 추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측면이 있었기에, 反신제이파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 한 채로 쿠마노(熊野) 참배에 나섰던 것이다. 이리하여, 헤이지의 난의 막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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