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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5 (0) 2018/10/31 AM 12:05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三. 노부요리(信頼)의 승리

 

◇ 산죠도노(三条殿) 야습

~ 헤이지(平治) 원년(1159) 12월 9일 심야, 무장한 군세(軍勢)가 쿄(京) 안을 달리고 있다.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래 3년만에 일어난 사건이다. 통솔하고 있는 것은 곤노츄나곤(権中納言) 후지와라노부요리(藤原信頼), 그 주력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군세였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쿄 밖에 있던 시라카와(白河)를 향했던 데에 반해, 이번 공격 대상은 쿄 안... 그것도 사쿄(左京)의 중심에 있었던 인고쇼(院御所)인 산죠도노(三条殿)였다.

 산죠도노는 산죠히가시도노(三条東殿)라고도 불리웠으며, 시라카와인(白河院)의 인고쇼로서 조영(造営)되었다. 시라카와인이 죽은 뒤, 고시라카와 죠코(後白河上皇)의 모친인 타이켄몬인(待賢門院)에게 전령(伝領)되었고, 나중에는 고시라카와의 누이인 죠사이몬인(上西門院)의 고쇼가 되는 역사를 가졌다. 닌페이(仁平) 원년(1151)에 소실되어 이제 막 재건된 상황이었다. 소재지는 산죠보(三条坊) 13쵸(町), 산죠 대로(三条大路) 북쪽, 카라스마 거리(烏丸通)의 동쪽으로, 셋칸케(摂関家)의 정저(正邸)인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와 아주 가까운 곳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사쿄의 정치적 중추라고도 해야 할 지역이다.

『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신제이(信西)는 자식들과 함께 항상 인고쇼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몰살시키려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신제이는 고시라카와인의 인정(院政)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도 해야 할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이었을 장남 토시노리(俊憲)도 마찬가지로 인고쇼에 있었다는 것은, 텐노와 신제이, 토시노리 부자의 관계가 악화 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 코레카타(惟方)들에 의해 신제이 일족은 텐노 주변으로부터 배제되어 인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세는 산죠도노를 포위하여 불을 지른다고 하는...『今昔物語集(콘쟈쿠모노가타리슈)』등에서 보이는 토고쿠(東国)의 전투와 같은 작전을 취했다. 어쩌면 요시토모의 헌책(献策)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고시라카와 죠코와 그의 누이인 죠사이몬인을 납치하여 다이리(内裏) 안에서 희구본(稀希覯本)을 서사(書写), 보관하는 잇폰노고쇼도코로(一本御書所)에 유폐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전년 7월, 아직 재위 중이었던 고시라카와 텐노가 노부요리,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들과 함께 행행(行幸) 한 적이 있었다. 노부요리들은, 이 경험 때문에 잇폰노고쇼도코로를 골랐을지도 모르겠다. 니죠 텐노는 원래부터 다이리에 있었기 때문에, 인과 텐노를 같은 다이리 안에다 가두고 감시하에 두었다는 뜻이 된다. 

 이때에 고시라카와, 죠사이몬인을 태울 수레를 준비한 것은 노부요리의 맹우(盟友)인 모로나카, 인, 뇨인(女院)을 호송한 것은 미나모토노시게나리(源重成),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의 조카인 미츠모토(光基), 그리고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출신인 스에자네(季実)였다. 시게나리, 스에자네는 요시토모와의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미츠야스 등의 미노 겐지(美濃源氏) 일족은 니죠 텐노의 측근이라는 입장 때문에 反신제이라는 목적으로 참전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난의 제 2 단계에서의 행동을 통해서도 명확해진다. 

 한편,『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그들은 신제이나 그 일족의 살해를 목표로 하여 그야말로 토고쿠의 사전(私戦)과 마찬가지로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자들을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사살했다고 한다.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 오오에 이에나카(大江家仲), 타이라노야스타다(平康忠)를 시작으로, 일반 관인(官人)이나 도망치는 뇨보(女房)들까지 희생되었다고 나온다. 본래 청정을 유지하고 더러움을 기피한 사쿄의 중심부에서 군사 행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고 한다. 호겐의 난에서의 전투는 카모 강(鴨川) 이동(移東)인 쿄 밖에서 있었기 때문에, 이 살육을 사실이라 친다면, 쿄 안에서 벌어진 첫 전투라는 뜻이 된다.  

 벤칸(弁官) 인사를 기록한『弁官補仁(벤칸부닌)』이라는 서적에 따르면, 신제이의 차남이자 종 4위하 곤노우츄벤(権右中弁)이었던 후지와라노사다노리(藤原貞憲)는,「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시 격렬한 전투가 치러졌고, 상당한 수의 전사자가 나왔다는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이 모습을 묘사한『平治物語絵巻(헤이지모노가타리에마키)』는 회화의 정밀함도 있어서인지 보고 있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인고쇼를 둘러싸고 있는 격렬한 홍련(紅蓮)의 불꽃, 그 아래에서 무사들에게 밀려 목이 잘리는 관인, 말발굽에 밟혀 겹겹이 쓰러져 죽어가는 뇨보들. 전란의 추함을 잘 보여주는 처절함에는 숨을 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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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사다노리 이외에, 인고쇼에 있었던 토시노리도『구칸쇼』에 따르면「タダヤケ死ナント思テ、北ノタイ縁ノ下ニ入テアリケルガ、見マハシケルニ逃ヌベクテ、焰ノタダモエニモエニケルニ、ハシリイデテ(이대로 있다가는 타죽겠다고 생각해, 북쪽을 따라 들어갔으나 앞이 보이지 않아 달아나지 못 했는데, 불꽃을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어 그대로 뛰쳐나가」탈출 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제이의 아내인 키노 2위 쵸시(紀二位朝子)도, 죠사이몬인의 옷자락으로 몸을 감싸고 위기를 벗어났다. 어찌됐든, 고쇼는 포위, 방화되어 살육이 벌어졌지만, 정작 신제이의 처자식들은 무사했다는 뜻이다. 

 신제이는 사전에 사태를 파악해 오우미(近江)와의 경계와 가까운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타하라(田原)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미「장한가(長恨歌)」의 에마키를 작성하여 노부요리의 위험성을 고시라카와에게 호소했던 신제이였기에, 평소부터 정변(政変)의 발발을 어느정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며, 직전에 무사의 움직임 등을 통해 노부요리의 공격을 추측했을 가능성은 높아서, 자식들에게도 위험을 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족에게도 긴급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또, 역으로 노부요리 쪽의 인원수를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급격하고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전한 인원수도 적었으리라 생각된다. 토고쿠로부터의 무사들의 동원도 거병 후의 일이라 여겨진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감시도 불충분해져 주요한 인물들을 확보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노부요리, 요시토모 측은 고시라카와인과 죠사이몬인의 신병을 확보해, 니죠 텐노와 함께 왕권을 지배하에 두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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