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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6 (0) 2018/11/01 PM 10:28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三. 노부요리(信頼)의 승리

 

◇ 신제이(信西)의 최후

~ 신제이(信西) 일족은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들의 공격을 피해 어떻게든 사지(死地)를 벗어났다. 무사들이라면 일종의 치외법권(治外法権)과 직속의 무력(武力)을 가지고서 공적 권력(公的権力)의 개입을 거부하는 영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잠깐동안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겐페이 쟁란(源平争乱)에서 패배한 헤이시(平氏)의 낭도들 중에서 사무라이타이쇼(侍大将)라고 해야 할 법한 후지와라노타다키요(藤原忠清)는, 이가(伊賀)와 이세(伊勢)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던 데다, 장기간에 걸쳐 잠복을 계속해, 쿄(京)의 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쿠게(公家)인 신제이 일족에게는 그러한 영지도, 지켜줄 무력도 없었다. 신제이가 달아난 곳은, 일찍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살해당한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로부터 난이 있은 직후에 몰관(没官)한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타하라노쇼(田原荘)에 있던 다이도지(大道寺)였다고 한다. 현재의 쿄토 부(京都府) 츠츠키 군(綴喜郡) 우지(宇治) 타하라 쵸(田原町)로, 우지, 죠쇼 시(城陽市)의 동쪽에 해당한다.『愚管抄(구칸쇼)』는 야마토(大和)라 하고 있는데, 이는 물론 오류이며 실제로는 야마시로노쿠니에 속한 지역들 중에서도 오우미와 가깝다.『百連抄(햐쿠렌쇼)』에서는 신제이가 자살 한 곳을「오우미노쿠니 시가라키 산(志加良木山 = 信楽山)」이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이 장원(荘園)은 고시라카와의 고인령(後院領)이 되어있었으니, 신제이는 아즈카리도코로(預所)라는 지위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신제이의 지배하에 들어간지 3년 정도 지난 장원이, 안주 할 땅이었을 리가 없다. 여기까지 도망친 게 한계점이지 않았을까? 그는 수행하고 있던 사에몬노죠(左衛門尉) 후지와라노모로미츠(藤原師光) 이하의 네 사람의 낭도들에게 법명(法名)을 주고는 그들에게 명령해 자신을 땅 속 깊이 매장하게 했다. 덧붙여, 모로미츠의 법명은 사이코(西光)이다. 나중에, 얄궂게도 노부요리와 함께 신제이를 공격한 나리치카(成親)의 매제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에「키리모노(きり者)」를 읊은 수완으로 고시라카와의 측근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에서도 나리치카와 함께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게 살해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여담은 둘째 치고, 신제이가 땅 속에 묻힌 이유는 결코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책은 아니었다.『구칸쇼』에 따르면, 그는 땅 속에서 소리 높혀「나무아미타불(南無阿弥陀仏)」을 외쳤다고 한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도 죽기 전에 발견될 경우 자살해버리겠다고 말을 하고 있어, 코치(河内) 씨의 분석대로 이대로 땅 속에서 죽어버려야지 노부요리 측에게 자신의 유해를 넘겨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미 도망 갈 방법이 없다고 보고,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구칸쇼』에 따르면, 그는 별의 움직임을 보고서는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忠臣、君にかはるといふ天変」... 즉, 자신이 자살을 하는 것으로 군주... 그러니까 고시라카와를 대신하겠다고 나온다.

 타이라노키요모리가 쿄(京)에 없었다고는 해도, 헤이시(平氏)와 제휴관계에 있었더라면, 로쿠하라(六波羅)에서 헤이시 이치몬(一門)의 저택 등에 피신해 있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자식인 시게노리(成憲)는 로쿠하라로 달아났는데, 신병은 노부요리 쪽에 인도되고만다. 신제이 측의 강한 압력도 어느정도 작용했겠지만, 신제이와 헤이시 이치몬이 그리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들의 중심 인물인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 코레카타(惟方)는 신제이 타도 계획의 주모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텐노가 노부요리의 폭발을 억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노부요리를 억제하여, 신제이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시라카와인 뿐이었다.『헤이지모노가타리』는, 신제이가 노부요리의 음모를 주상하려 했을 때, 고시라카와인은「御遊」중이었기 때문에 흥을 깨서는 안 된다고 하여 뇨보(女房)에게 전언한 다음에야 타하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선술했듯이, 신제이는 당(唐)의 현종 황제(玄宗皇帝)와 양귀비(楊貴妃)의 비극을 묘사한「장한가」의 에마키를 작성하여 노부요리를 현종의 총신(寵臣)인 안록산(安禄山)에 비유하여 그의 위험성을 고시라카와에게 진언했다고 한다. 이때가 헤이지(平治) 원년(1159) 11월 15일, 사건이 발발하기 불과 3주 전이었다. 하지만, 에마키를 통한 신제이의 경고를 고시라카와인은 무시했다. 어쩌면 인은 노부요리를 신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노부요리에게 신제이의 고발을 전해줬을 가능성도 있다.

 인이 그러한 태도를 취한 이상, 이미 신제이를 보호해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제이는, 행방을 수색하고 있던 미노 겐지 출신의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에게 숨어있던 곳을 발각당한다.『헤이지모노가타리』는 12월 14일의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살하려던 것을 파헤쳐 참수당한 다음에 17일에는 쿄 대로에서 잘린 목이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고쿠몬(獄門)에 효수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참수, 대로변에서의 구경거리, 그리고 고쿠몬이라는 극형은, 그가「모반인(謀反人)」으로서 대우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처벌이 내려진 것에 대해, 여러 사료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고시라카와인의 인정을 실현하기 위해, 니죠 텐노의 폐위를 꾀했다는 정도의 음모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텐노나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암살을 꾀했다는 식의 입에 담기도 꺼림칙한 구실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구실이 어쨌든간에, 실제로는 신제이에게 야심을 밀고 받은 노부요리, 정무에 있어서 바람 앞에 촛불 신세였던 츠네무네, 코레카타들에 의한 보복이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이보다 앞서, 난이 발발한 다음날인 10일, 산기(参議) 토시노리(俊憲), 곤노우츄벤(権右中弁) 사다노리貞憲, 고시라카와의 측근인 하리마노카미(播磨守) 시게노리, 미노노카미(美濃守) 나가노리(脩憲) 이하의 신제이의 자식들은 전원 유배형에 처해졌다. 22일에 승려를 포함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유배지로 내려보냈다. 이치몬 전체가 모반인으로서 처단당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 말기에 두각을 드러낸 뒤로 대략 10년... 그리고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래 3년 남짓 정무를 주도해온 신제이는 무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불세출의 민완 정치가도 어이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땅 속에서 보낸 마지막 4일동안 가슴 속에 떠올린 것은, 영화(栄華)에 대한 추억이었을까... 일찍이 친구였으면서도 사지로 몰아낸 요리나가(頼長)였을까? 그게 아니면, 자신이 죽어서 갈 극락의 모습이었을까? 요리나가와 마찬가지로, 신제이도 상상을 초월한 최후를 맞이했다.

 자식들도 유배되면서 그의 이치몬은 괴멸되었다. 그를 대신해 정무를 주도한 이가 노부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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