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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7 (0) 2018/11/04 PM 11:49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三. 노부요리(信頼)의 승리

 

◇ 거병의 배경

~ 反신제이(信西)의 물결은 크고 높아져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는 정변(政変)을 야기하게 된다. 反신제이파는 적지 않았지만,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라는 무력(武力)을 보유한 노부요리가 주도권을 쥐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노부요리는 무력에 의한 신제이 타도라는 과격한 수단을 선택했던걸까?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이나 니죠 텐노(二条天皇)를 통해 몰아부치는 것도 가능했을텐데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시라카와인이 토바인(鳥羽院)이 결정한 황위계승에 반발하여, 니죠의 동생이자 훗날의 슈카쿠 법친왕(守覚法親王)을 즉위시키기 위해 신제이 살해를 꾀했고, 노부요리에게 거병을 명령했다고 하는 코치(河内) 씨의「새로운 설(新説)」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수긍할 수 없다. 인이 신제이를 주살하고자 했다면, 죄를 뒤집어 씌어 유배를 보내면 그만이다. 또, 니죠 텐노를 황위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어째서 고시라카와를 옹립하여 인정(院政)의 중심에 있던 신제이를 죽일 필요가 있었던걸까? 멸망시키려면 니죠 텐노의 측근들이었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니죠의 외척인 후지와라노츠네무네(藤原経宗)가... 어째서 니죠의 입장을 부정하는 음모에 협력했던걸까?

 또, 슈카쿠와 마찬가지로 후지와라노세이시(藤原成子)를 모친으로 둔 모치히토(以仁)는 출가도 하지 않고 친왕 선하(宣下)조차도 받지 않았다. 고시라카와는 세이시 소생인 황자를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극히 기초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것 만으로도 코치 씨의 해석은 성립될 여지가 전혀 없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노부요리의 입장이다. 노부요리는 요시토모의 낭도들을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오우슈 후지와라(奥州藤原) 씨를 장악하였고,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와도 연계하는 입장에 있었다. 당시의 유력 무사 모두와 관계를 가져 마음대로 강력한 무력을 행사하는 최대의 무문(武門)이었다. 그는 고시라카와의 총애에 의지하기만 한 무력한 존재도 아니었으며, 불만분자(不満分子)인 요시토모와 급격하게 제휴한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신제이에게도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이하와의 연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노부요리와 요시토모와의 관계와 비교하면 훨씬더 원만한... 정치적 동맹 같은 관계라 해야 할 것이었다. 필시, 공적 수단을 취하지 않는다면 신제이가 키요모리를 동원하는 것은 곤란했을 것이다. 마음대로 요시토모를 동원할 수 있는 노부요리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노부요리, 요시토모 관계와 신제이, 키요모리 관계를 동등하게 보는 통설은 고쳐져야 한다.

 이 당시, 무사들 중에는 훗날의 키요모리나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와 같은... 자신이 높은 정치적 지위를 가져 무사들을 조직하는 존재는 아직 없었다. 인정기(院政期)의 쿄무쟈(京武者)라는 식으로 불리던 군사 귀족들은, 인이나 셋칸케(摂関家)를 시작으로 하는 유력한 권문(権門)에 종속해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겐의 난(保元の乱)으로 셋칸케의 무력은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주력이 되었다가 멸망하였고, 치천의 군주(治天の君)가 없었던지라 권문으로서의 왕가도 해체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대신해서 노부요리는 요시토모를 중심으로 한 무력을 수중에 넣었고, 급격하게 교 안에서의 무문(武門)을 통합한 자라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부친도 무예에 뛰어났던 노부요리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이 단계에서는 무용(武勇)이 뛰어난 쿠게(公家)가 유력한 무사를 조직하여, 새로운 무문으로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무문으로서의 입장을 명시해주는 게 노부요리의 누이동생과 칸파쿠(関白) 모토자네(基実)의 혼인이었다. 노부요리와의 분쟁이 있었을 때에, 고시라카와로부터 굴욕적인 처벌을 받은 타다미치(忠通)가 굳이 자신의 적자와 노부요리의 누이동생의 혼인을 인정한 배경에는, 호겐의 난으로 잃어버린 무력을 대신 할 것이 필요했다는 사정이 개재되어 있다. 이것은 동시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당시의 노부요리가 셋칸케의 권위를 이용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거기다, 자신은 고시라카와인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고시라카와로부터 부정되었다는 것은 일단 생각하기 어렵다. 또, 후지와라노츠네무네, 코레카타(惟方)라는 니죠 텐노의 측근과 제휴하고 있었기 때문에, 텐노의 의지(意志)도 제어하기 쉬웠다. 따라서, 강제적인 군사 행동을 야기하더라도 텐노의 이름 아래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노부요리 폭발의 배경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단순히 신제이 이치몬을 배제하기 위해, 일부러 인고쇼(院御所)를 습격하여 살육을 행할 필요가 있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남는다. 다음으로 거병 이후의 노부요리의 행동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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