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장 -싸움의 종식
一. 텐노(天皇)・죠코(上皇)의 탈출
◇ 키요모리(清盛)의 귀경(帰京)
~ 일찍이 키누가사 테이노스케(衣笠貞之助)라는 유명한 영화 감독의 작품 중에『地獄門(지옥문)』이라는 걸작이 있었다. 쇼와(昭和) 28년(1953)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토리 쪽은 사실(史実)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쿄(京)에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발발하자마자, 하세가와 카즈오(長谷川一夫)가 연기한 엔도 모리토(遠藤盛遠)가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게 위급함을 알리는데, 센다 코레야(千田是也)가 연기한 키요모리는 이츠쿠시마 진쟈(厳島神社)에서 승려의 모습을 한 채로 돌아보는 게 아닌가. 키요모리의 출가는 닌안(仁安) 3년(1168)이기 때문에 9년이나 앞지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헤이지의 난의 급보를 받은 것은 실제로는 이츠쿠시마가 아니라 키이노쿠니(紀伊国)의 타나베(田辺) 부근에서였다.
키요모리는 차남인 에치젠노카미(越前守) 모토모리(基盛)와 셋째 아들인 무네모리(宗盛), 거기에 사무라이(侍) 열다섯을 거느리고 쿠마노(熊野)로 참배하러 가던 도중이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있을 뿐이었던 여행길에서 대사건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키요모리가 깜짝 놀라 어찌 할 바를 몰라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이대로 쭉 츠쿠시(筑紫) 방면으로 가서 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コレヨリタダツクシザマ)」는 식의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키요모리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나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거병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쿠마노 참배에 나섰다는 식의 해석은 성립되기 어렵다.
키요모리가 쿄를 떠난 것은 국문학 자료관이 소장한『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의 사본(写本)에 따르면, 헤이지(平治) 원년(1159) 12월 4일이었다 한다. 타나베는 해안선을 따라 나있는 길에서 쿠마노 쪽으로 가는 산길, 나카헤지(中辺路)로 가는 입구에 해당해, 쿄에서 멀리 떨여져 있었다. 4일에 출경(出京)한 키요모리가, 그리 간단히 돌아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에 그 틈을 찔러 노부요리와 요시토모가 거병했다는 뜻이 된다. 역시나 키요모리의 방해가 성가셨을 것이다.
동요한 키요모리를 구한 것은 키이의 무사들이었다. 먼저 유아사 무네시게(湯浅宗重)는 37기나 되는 무사를 제공하여「즉시 쿄로 들어가시옵소서(タダオハシマセ。京ヘハ入レマイラセナン)」라며 키요모리에게 기운을 복돋아 주었다. 15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키요모리 일행에게 있어서 그야말로「때마침 아주 좋은 병력(ソノ時ハヨキ勢)」이었다. 이 유아사 씨는, 쿠마노 참배길을 관리하면서 대두한 일족으로, 이 이후 헤이시(平氏)의 중요한 낭도로서 활약한다. 또, 쿠마노 벳토(熊野別当) 탄카이(湛海)는, 병력을 제공하지는 못 했지만, 활과 화살, 거기다 갑주 7벌을 키요모리에게 건내주었다.
덧붙여,『헤이지모노가타리』에는, 타이라노이에사다(平家貞)가 무구(武具)를 몰래 지참하거나 하며, 요시히라義平)의 공격을 염려하여 시코쿠(四国)로 달아나려 한 키요모리를 시게모리(重盛)가 제지하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구칸쇼』에 따르면 시게모리는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무구도 쿠마노 벳토 등에게 빌려 쓰고 있어 허구일 것이라 생각된다. 어찌됐든, 키요모리의 명성이 키슈(紀州)의 무사들에게도 침투해 있어, 그것이 그를 궁지로부터 벗어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이리하여 키요모리는 17일에는 어렵지 않게 입경할 수 있었다.『구칸쇼』는「スベカラク義朝ハウツベカリケルヲ、東国ノ勢ナドモイマダツカザリケレバニヤ、コレヲバトモカクモサタセデアリケル」, 즉 몇 안 되는 소수의 병력으로 입경하려 한 키요모리를 토벌하려 했으나, 토고쿠의 무사 등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손 쓰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확실히, 최종적으로 키요모리의 군세가 노부요리와 요시토모 측을 괴멸시켜버린 결과를 감안하면, 그러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요시토모 측의 실책이라 할 수는 없다. 일단, 이미 여러번 말해왔듯이, 키요모리는 신제이(信西) 쪽도 아니었고, 하물며 노부요리와는 인척관계에 있었기에 더더욱 토벌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인고쇼(院御所) 습격이라는 과격한 작전을 행하려다 보니 방해받을 우려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요모리의 동향을 살피며 거병했겠지만, 노부요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도권을 확립해버리면 오히려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 아무리 요시토모가 키요모리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해도,『구칸쇼』가 추측하듯이 병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라 생각된다. 비밀리에 거병을 했던 만큼, 사전에 수많은 무사를 토고쿠로부터 동원하는 것은 곤란했다. 덤으로, 요시토모에게는 쿄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낭도들이 거의 없어, 서둘러 군세를 동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얼마 안 되는 무력으로 쿄를 제압한 데에 지나지 않아, 그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나눠 키요모리를 맞받아 치는 건 불가능했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현재의 오오사카 시(大阪市)에 해당하는 아베노(阿倍野) 부근에서 요시히라가 잠복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행은 이를 염려했으나, 이들이 실은 헤이시의 낭도들이었다고 하는 삽화(挿話)가 있다. 이때 전투를 한 것은『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이토 카게츠나(伊藤景綱),『古事談(코지단)』에도 등장하는 타치 사다야스(舘貞保), 고헤이 시로(後平四郎) 같은 이가(伊賀), 이세(伊勢)에 있는 키요모리의 심복 낭도들이었다고 한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이가와 이세의 영지를 중심으로 하여, 쿄 주변에 키요모리의 낭도는 다수 존재하고 있었기에, 귀경할 때까지 수많은 자들이 키요모리 일행에 가담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헤이지모노가타리』가 말 하는 4, 500기를 통솔한 데에 지나지 않았던 요시토모가, 입경하는 키요모리를 토벌하는 일 같은 건 아무래도 곤란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리하여 헤이시 이치몬의 총수는 쿄로 복귀했다. 노부요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키요모리의 입경은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리고, 요시토모의 무력으로 쿄를 제압하는 것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던 노부요리의 우위가 흔들리기 시작해, 정정(政情)은 크게 전개 해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