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MYPI

☆잉여인간☆
접속 : 3375   Lv. 39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91 명
  • 전체 : 2406531 명
  • Mypi Ver. 0.3.1 β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50 (0) 2018/11/07 PM 11:52

제 05장 -싸움의 종식

 

 

一. 텐노(天皇)・죠코(上皇)의 탈출

 

◇ 킨노리(公教)와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

~『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귀경(帰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나이다이진(内大臣)이자 사다이쇼(左大将)였던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였다. 앞에서도 다뤘듯이, 킨노리는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이었던 사네유키(実行)의 장남으로, 스토쿠 텐노(崇徳天皇)의 외척인 칸인류(閑院流) 출신이었는데, 모친은 후지와라노아키스에(藤原顕季)의 딸... 즉,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숙모에 해당했기 때문에, 비후쿠몬인이나 인(院)의 근신들에게도 접근하여 신제이(信西)의 장남인 토시노리(俊憲)를 사위로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토바인(鳥羽院)의 인정기(院政期) 말기부터 정무의 중추에 참가하여 기록소 죠케이(記録所上卿)를 맡았다는 것은 선술한대로이다. 오오오미 이상의 직급 중에서는 가장 강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부친인 사네유키와 함께「世ハカクテハイカガセンゾ。信頼・義朝・師仲等ガ中ニ、マコトシク世ヲオコナフベキ人ナシ」라고 개탄했다 한다. 무력(武力)에 의한 신제이의 토벌,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의 강제적인 권력 탈취에, 신제이와 친하게 지냈던 킨노리가 분통을 터트리는 것도 당연했다. 여기서 킨노리는 난의 주모자들 중에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의 중심인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에게 접근하여 키요모리의 입경(入京)을 계기로 하여 로쿠하라(六波羅)로의 텐노 행행(行幸)을 언질한 것이다.

『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코레카타의 형인 미츠요리(光頼)가 다이리(内裏)에 있는 쿠교센기(公卿僉議)에 들어가서는 멋대로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노부요리를 쫓아내고는 그 자리에 착석, 그의 전횡을 지적함과 동시에, 노부요리의 편을 든 동생 코레카타를 나무라며 텐노 탈출을 위한 포석을 깔아두었다고 한다. 쿠사카 츠토무(日下力) 씨가 지적했듯이, 이 부분은『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의 시시가타니 사건(鹿ケ谷事件)에 관한 기술 중에서 타이라노시게모리(平重盛)의 키요모리에 대한 교훈과 공통되고 있어, 사실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쿠사카 씨가 말하는 하무로(葉室) 가문을 중시한 작가의 자세와 함께, 미츠요리가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전후로 한 혼미 속에서, 중립을 지켜왔던 것을 두고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킨노리가 니죠 텐노의 측근들에게 접근한 배경에는 어쩌면『구칸쇼』가 말하고 있듯이, 노부요리, 요시토모, 모로나카(師仲) 같은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이 요시토모의 무력을 배경으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어, 니죠 텐노의 측근들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져 갔던 것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츠네무네나 코레카타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제이 타도에는 정치 주도권 획득이라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기에, 노부요리가 아무리 니죠 텐노의 친정(親政)을 지지한다 해도, 노부요리나 고시라카와의 측근들에 의한 정치의 주도 같은 건 도무지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과 텐노 쌍방의 측근들은, 신제이 타도라는 목적으로 결합하여 니죠 텐노 친정의 실현이라는 점에서도 협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 주도권의 장악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둘러싸고, 결정적인 대립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무인 기질이 있던 노부요리는, 무위(武威)로 제압하면 주위를 종속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권력 탈취 후의 명확한 구상이 부족했던 게 코레카타들의 이탈과 권력의 붕괴로 연결되었다 할 수 있다.

 한편, 키요모리도 노부요리와는 인척관계가 있긴 했지만, 그를 무시하고 위기로 내모는 강제적인 행동에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며, 노부요리와 요시토모가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에 위험을 느꼈으리라고도 생각된다. 또, 요시토모의 주력은 토고쿠(東国)로부터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당시의 무력은 생각 외로 약체였다. 쿄(京) 근처에서 이가(伊賀), 이세(伊勢), 사이고쿠(西国)로부터 무력을 동원하면, 그들을 제압하기 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부요리, 요시토모의 토벌을 통해, 정치의 중추에 들어가고자 하는 야심도 싹텄으리라 생각된다. 

 정변(政変)의 주모자 중 일부가 여기에 응한 만큼, 뒷일은 간단했다. 킨노리와 코레카타 사이에서 텐노의 로쿠하라 행행 계획이 결정되고, 코레카타의 아내와 남매지간이었던 히쿠로도(非蔵人) 타다아키(尹明)가 밀명을 띄고 다이리로 들어가 텐노를 탈출시킴과 동시에, 중보(重宝)를 가지고 나오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키요모리는 노부요리에게 명부를 제출하여 공순(恭順)의 뜻을 내비침과 동시에, 사위이자 로쿠하라로 마중을 나왔던 노부치카(信親)를 정중히 돌려보냈다. 명부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여 주군에게 제출하는 종이 조각으로, 이를 제출한다는 것은 종신을 의미한다. 쿠게에서는 만도코로(政所) 등의 개설이 있을 때에 벳토(別当) 이하가 주군에게 제출한 것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실제로는 킨노리가 작성하고 키요모리의 낭도인 타이라노이에사다(平家貞)가 지참했다고 한다. 그것은 정확히 텐노 탈출 계획이 실행된 당일... 그러니까 12월 25일 이른 아침이었다 한다.

 또,『코지단』에 따르면, 노부치카의 경호를 담당했던 키요모리의 낭도들은 난바 사부로 츠네후사(難波三郎経房), 타치 타로 사다야스(舘太郎貞安 = 舘太郎貞保), 헤이지로 우마노죠 모리노부(平次郎馬允盛信), 이토 카게츠나(伊藤景綱)였다. 난바는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도 이름이 등장했던 비젠(備前) 출신의 무사이고, 타치와 이토는 아베노(阿倍野)에서 키요모리를 마중나왔다고 여겨지는 이세 출신의 무사이다. 이미 키요모리는 쿄 주변의 주요한 낭도들을 소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요시토모는,「대단한 자들이다. 모두가 일기당천의 무사들이구나」라며 칭찬함과 동시에, 분명 자신들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로 이야기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사실이라 친다면, 단순히 그들의 무사로서의 무위(武威)를 떨치는 것 뿐만 아니라, 헤이시가 이미 주요한 낭도를 소집해 있었고, 반대로 자신의 무력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어 탄식한 게 아니었을까? 

 

신고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