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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53 (0) 2018/11/11 PM 11:41

제 05장 -싸움의 종식

 

 

二.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의 전멸

 

◇ 요시토모(義朝)의 봉기(蜂起)

 

【カカリケル程ニ内裏ニハ信頼・義朝・師仲。南殿ニテアブノ目ヌケタル如クニテアリケリ】


『愚管抄(구칸쇼)』에서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12월 26일 아침,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 이하는 텐노(天皇)와 죠코(上皇)가 탈출했음을 알고 마치 눈알이 뽑혀 방향을 잃어버린 등애 같았다고 말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 할 근거를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왕권을 지배하고 권력을 탈취한지 불과 2주 남짓한 시간이었다. 

 항복한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의 증언에 따르면,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가 노부요리에게「일본 제일의 멍청이를 믿고 의지한 탓에 이렇게 되어버렸다(日本第一ノ不覚人ナリケル人ヲタノミテ、カカル事ヲシ出ツル)」고 매도했던 데에 대해, 노부요리는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고 한다. 그의 입장도 설마하니 숙부이자 맹우(盟友)였던 코레카타(惟方)에게 배신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일 것이다. 이 증언이, 어리석고 무능한 노부요리상(像)을 유포시킨 커다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남겨진 길은 항복하여 처형을 기다릴지, 아니면 요시토모의 무력(武力)에 의해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할지로 나뉘었다. 그야말로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의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와 같은 운명에 내몰린 것이다. 노부요리는 통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은 무능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무인(武人)으로서는 유능했다. 무력에 의한 권력 탈취라는 행동 자체는, 그야말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나 미나모토노요시나카(源義仲)의 선례(先蹤)라고도 해야 할 것이기에, 결과를 통해 노부요리를 단락적으로 비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그는 무력으로 빼앗은 권력이 첨에한 반발을 낳았다는 것, 따라서 권력의 유지가 어려웠음을 인식하지 못 했다. 확실한 승리에 도취되어 다음 책략을 생각해내지 못 했기 때문에, 그는 제 무덤을 파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측근들, 신제이(信西) 타도의 선봉장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쓰다 버려지는 결과가 되었다.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 특히 실무관료로서 정무의 중추에 있으면서 황파를 견디고 있던 코레카타는, 무력에 의존한 노부요리보다 몇 수 위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출격의 때에,『구칸쇼』는 노부요리가 갑옷 같은 무구(武具)을 착용하여 무장하고 요시토모와 함께 출진했다고 한다. 다만,『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나와있듯이, 겁을 먹고 엉망진창으로 추태를 보인 모습은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 나름의 무인으로서의 각오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모로나카는 3종 신기(神器) 중 하나인 나이시도코로(内侍所)... 즉, 신경(神鏡)을 몰래 품에 지녀, 다이토케이의 카라비츠(大刀契の唐櫃)의 열쇠도 노부요리로부터 감쪽같이 빼앗았다. 이미 항복 할 때의 보신(保身)을 고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난에 대한 관여 정도의 차이가, 행동의 차이가 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또,『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무사들 중에서도 미나모토노미츠야스(源光保), 미츠모토(光基) 등은 요시토모를 배신할 움직임을 보여 일단은 요메이몬(陽明門) 경호를 맡았으나, 결국은 헤이시(平氏)의 편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니죠 텐노의 측근으로서 협력을 했기 때문에, 텐노가 탈출을 함과 동시에 요시토모에게 가망이 없다고 본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그들은 니죠 텐노의 탈출로부터 얼마지 않아 이들 진영으로부터 이탈해버렸을 것이다. 원래, 위계(位階)를 보더라도 요시토모를 능가한 미츠야스는, 타도 신제이에 찬동했을 뿐인지라, 같은 무문(武門)인 겐지(源氏)라 할지라도, 요시토모를 따르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는, 나중에 로쿠하라(六波羅)에서 요시토모 측과 전투를 벌였다고 여겨지는 셋츠 겐지(摂津源氏) 출신인 요리마사(頼政)와도 비슷했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원래 비후쿠몬인(美福門院)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미츠야스의 입장도 요리마사의 입장도, 그들은 독립된 군사 귀족이었기에, 각자가 독자적으로 왕권과 결합해 있었다. 정정(政情)의 추이에 따라 독자적 판단으로 행동한 것이다. 무문 겐지는 누구든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당주에게 종속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 하는『헤이지모노가타리』의 기술은, 요시토모의 아들인 요리토모(頼朝)에 의해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창설된 이후의 관념을 전제로 한 기술이나 다름 없다. 

 요시토모의 무력에 대해서는『헤이지모노가타리』의 기술을 통해 추측해 보는 수 밖에 없다. 여기서도 그를 수행한 것은 자식인 요시히라(義平), 토모나가(朝長), 요리토모, 거기에 동생인 요시아키(義章: 요시노리), 요시모리(義盛: 유키이에), 숙부인 요시타카(義隆), 시나노 겐지(信濃源氏) 출신인 히라가 요시노부(平賀義信) 같은 일족과, 심복인 카마타 마사이에(蒲田正家), 미우라(三浦), 야마노우치(山内) 등의 사가미(相模) 출신 무사들이었다고 한다. 

 요시노리(義憲)와 유키이에(行家)에 대해서는,『吾妻鏡(아즈마카가미)』등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참전했다고 하는 기술은 없다. 거기다 요시노리의 경우는 요리토모가 거병했을 당시, 하치죠인령(八条院領)인 히타치노쿠니(常陸国) 시다노쇼(志太荘)에서 커다란 세력을 갖고 있었다. 난에 관여했다고 한다면, 헤이시 정권 아래에서 그러한 지위에 오르기란 어려웠기 때문에, 요시토모를 따라 참전했다고 말하는『헤이지모노가타리』의 기술은 의문스럽다. 

 또, 요시토모를 대신해 카마쿠라(鎌倉)의 주인이 되어 있던 요시히라가 토고쿠(東国)의 정예들을 이끌고 참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 주력은 불과 17기에 지나지 않았고, 요시토모군의 총세도 200기 남짓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군기물(軍記物)에서는 실제 수보다 많은 표현이 눈에 띄는 만큼, 이 기술은 요시토모군이 상당히 소규모였음을 말해준다.『아즈마카가미』등을 봐도, 헤이지의 난 이후, 영지 몰수 등의 피해를 입은 토고쿠 무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참전한 무사가 적었음을 뒷받침해줄 것이다. 

 요시토모군이 소규모였던 배경에는, 이미 반복해서 말해왔지만 원래 은밀했던 거병인지라, 많은 무사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는 것. 쿄(京) 주변에 충분한 낭도를 획득하지 못 했다는 것. 거기다, 주군에 대한 독립성이 강해, 자신의 영지 보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던 토고쿠 무사들이 간단하게 상경에 응하지 못 했다는 것. 그리고, 키요모리와의 전면대결 같은 건 예상하지 못 했다는 것 등의 사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요시토모는 텐노의 명령으로 추토당해야 할 적군으로 몰리게 되었고, 동맹군은 점차 이탈해갔다. 게다가, 원래 동원하고 있던 낭도는 아주 적었다. 그런 요시토모에게 이길 가망성은 없었다.「로쿠하라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체들이 즐비해 하나도 살아 남은 이가 없었다(イカサマニモ六波羅ニテ屍ヲサラサン、一アテシテコソ)」라 칭해진 절망적인 공격에 맞서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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