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장 -싸움의 종식
二.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의 전멸
◇ 공경(公卿)의 참수(斬首)
~ 패배 이후의 주모자들의 행동은 각양각색이었다. 로쿠하라(六波羅)에서 시체가 될 생각으로 돌입한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심복인 카마타 마사이에(蒲田正家)들의 설득으로 결국은 토고쿠(東国)를 목표로 달아나게 된다. 이에 반해,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 미나모토노모로나카(源師仲), 나리치카(成親) 같은 쿠게(公家)들은 모두 항복한지라, 패배 후의 행동은 대조적이었다. 먼저, 쿠게들의 운명에 대해 살펴보았으면 한다.
노부요리는 로쿠죠하라에서의 전투가 있었던 12월 26일, 나리치카와 함께 닌나지(仁和寺)에 있는 카쿠쇼 법친왕(覚性法親王)의 곁을 찾아갔다. 귀족치고는 무예가 뛰어난 그도 자력구제(自力救済) 속에서 연마해온 요시토모의 군사 행동에는 미쳐 따라 잡지 못 하고 탈락해버렸을 것이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는, 닌나지로 피신해있던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비호를 요구했다고 한다. 선술했듯이, 고시라카와인이 닌나지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카쿠쇼에게 고시라카와인에 대한 교섭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百練抄(햐쿠렌쇼)』에 따르면, 곧 바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의 샤테이(舎弟)인 츠네모리(経盛)가 닌나지로 가서 노부요리들의 신병을 구속했다. 처형 장소는『헤이지모노가타리』가 로쿠죠(六条)의 강변이라 하고 있는 데에 반해,『愚管抄(구칸쇼)』는「六原ノウシロニ清水アル所ニ平バリ」를 장소로 설정해 두어, 그곳에서 노부요리와 같은 길을 걸었던 나리치카를 꿇어앉혀 놓았다. 이때서야 노부요리는「アヤマタヌ(잘못을 저지르지 않은」이유를 주장하며 자기 변호를 했는데,「ヨニヨニワロク」... 즉, 너무나도 추한 변명으로 들렸다고 한다. 키요모리는「ナンデウ」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는건가... 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이 노부요리의 27년 인생의 끝이었다.
어쩌면 노부요리는 처형을 면해보고자 신제이(信西)의 잘못을 주장한다거나, 그를 배신한 코레카타(惟方)도 같은 죄임을 주장했던 게 아니었을까? 또, 자신은 무사가 아니라 귀족인 공경(公卿)인 탓에, 참수(斬首)만은 면해야 함을 열변했으리라 생각된다. 확실히,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도 무사는 참수당했지만, 귀족들 중에서 처형당한 자는 없었다. 귀족의 처형은 그야말로 다이도(大同) 5년(810)의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가 일으킨 난에서 후지와라노나카나리(藤原仲成) 이후에는 없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노부요리는 스스로 무사들을 이끌고 사건을 야기하였으며, 마지막까지 무장을 하고 전투에 가담하고 있어 전투원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또, 신제이를 무참한 최후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인고쇼(院御所)를 습격해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텐노(天皇)의 정무공간으로서 청정을 유지해야 할 쿄 안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그가 저지른 죄과(罪科)는 전례가 없던 것이었다.
또, 처형은 호겐의 난과 마찬가지로 난의 진압자인 키요모리가 담당했다. 역시나, 노부요리의 참수는 자력구제에 의한 처형의 연장이었기에, 노부요리가 전투원으로 대우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공경이라는 이유로 참수당한 목을 저잣거리의 구경거리로 만드는 굴욕적인 처치는 면했다고 한다. 속인(俗人)이었을 때에 공경으로 승진하지 못 한 신제이와는 사후의 대우가 달랐다.
『平家物語(헤이케모노가타리)』의 모두(冒頭)에는, 타이라노키요모리 이전의 거만한 이와 난폭한 행위를 일삼은 이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죠헤이(承平)의 타이라노마사카도(平将門)로 시작되어, 텐교(天慶)의 스미토모(純友), 코와(康和)의 요시치카(義親)와 나란히, 이 다음에 이름을 올리는 게 호겐(保元)의 요리나가(頼長)가 아니라 헤이지(平治)의 노부요리이다. 그는 역시나 대란의 장본인인 무사들과 나란히,「난폭하다」기 보다「거만한」무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듯 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장하고 행동을 함께한 나리치카도 로쿠하라로 연행되었는데,『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누이동생이 시게모리(重盛)의 아내였기 때문에 구명되었다고 한다.『愚管抄(구칸쇼)』에서는「フヨウ」(무용)이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져 처형은 면했다고 나온다. 나리치카는 유배형조차 면하게 되고 단순한 해관(解官)에 그치게 되지만, 불과 2년 뒤인 에이랴쿠(永暦) 2년(1161)에 우츄죠(右中将)로 복귀하여 다시 고시라카와인의 측근에 가담하게 된다. 음모에 대한 관여가 경미하다 여겨진 면도 있었으나, 역시나 시게모리와의 관계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던 이가 모로나카이다. 그는 선술한대로, 3종 신기(神器) 중 하나인 신경(神鏡)을 품에 숨겼고, 다이토케이(大刀契)의 열쇠도 탈취하여 항복의 증표로 삼으려 했다.『헤이지모노가타리』는, 노부요리들고 마찬가지로 닌나지로 갔다고 하지만,『햐쿠렌쇼』에이랴쿠 원년 4월 29일 조(条)에 따르면, 다이리(内裏)에서 출격하는 노부요리들과 헤어진 모로나카는 카츠라 강(桂川) 언저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거울을 아네가코지(姉小路) 히가시토인(東洞院)에 있던 저택에서 보관하고 자신은 로쿠하라로 출두했다고 한다.
신경을 지킨 상으로 감형을 기대한 모로나카였으나, 무투 훈련을 위해 후시미 산장(伏見山荘)을 제공한 것이 영향을 준 것인지, 처벌은 가혹하게 받았다. 그 자리에서 즉시 해관당한 데다, 익 에이랴쿠 원년 3월, 시모츠케노쿠니(下野国)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노부요리를 제외하면, 유배는 공경에 대한 극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귀경을 허락받은 것은 6년이 지난 뒤인 에이만(永万) 2년(1166)이 되고난 뒤로, 나리치카에 비하면,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귀경 후에는 정 3위로 복귀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곤노츄나곤(権中納言)으로 되돌아가지는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