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장 -싸움의 종식
二.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의 전멸
◇ 요시토모(義朝) 일족의 괴멸
~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몇 안 남은 병력을 데리고 직장(職場)을 이탈했다.『愚管抄(구칸쇼)』는「오오하라 센조쿠 고개(大原千束ガガケ)」에서 오우미(近江)로 빠져나갔다고 나와있다. 목적지는 그의 낭도들이 거주하는 토고쿠(東国)였다. 당초에는 로쿠하라(六波羅)에서 전사할 것을 각오한 그도,「会稽ヲ遂ント」라고 생각해서 탈출을 결의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쿄(京) 주변에 머물렀다가 결국은 항복한 부친 타메요시(為義) 이하의 호겐의 난(保元の乱)에 참가한 무사들과 다른 행동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손으로 부친 타메요시를 처형한 요시토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항복이 곧 죽음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순순히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토고쿠는 조정의 눈도 닿기 힘들었던 데다, 타메요시와는 달리 오랜 기간 카마쿠라(鎌倉) 부근에서 거주하며 쌓은 실적이 있었고, 수많은 낭도들도 존재했다. 따라서, 토고쿠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몸을 숨기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라도 토고쿠의 낭도들과 함께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확실하게 참전하고 있던 히라가 요시노부(平賀義信)는 살아남아, 나중에 거병한 요리토모(頼朝)에게 달려갔다.
조정의 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항복이나 자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워 승리에 의해 입장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발상은, 왕권을 상대화(相対化)한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토고쿠의 자력구제(自力救済) 속에서 키워온 사고(思考)나 다름 없었다. 단노우라 전투(壇ノ浦合戦)에서의 대패에 의해, 안토쿠 텐노(安徳天皇)의 왕권과 함께 전멸한 헤이시 이치몬(平氏一門)과는 크게 다른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왕권도 상대화해버린 토고쿠 무사들에 의해, 결국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수립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20여년 뒤의 일이다. 패주한 요시토모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은 너무나도 잔혹했다.『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오우미와의 경계와 가까운 오오하라(大原) 끝단의 류게 고개(龍華越)에서 엔랴쿠지(延暦寺)의 악승(悪僧)들의 습격을 받아 숙부인 요시타카(義隆)를 잃었다. 적자인 요리토모와 떨어진 데다, 부상을 입은 차남 토모나가(朝長)를 미노노쿠니(美濃国) 아오하카(青墓)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죽였다.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무사를 조직하려 한 장남 요시히라(義平)와 헤어져 오와리(尾張)에 이르렀다.
『구칸쇼』에 따르면, 요시토모는「馬ニモエノラズ、カチハダシ」... 즉, 타고있던 말도 잃어버리고, 맨발로 도보하는 비참한 모습으로 오와리노쿠니 우츠미(内海)의 쇼지(荘司)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忠致)를 찾아갔다. 그리고 결국, 탕 안에서 자신들을 받아준 게 모략임을 깨닫고 카마타 마사이에와 함께 자결해버렸다. 향년 서른일곱. 부친이나 동생을 멸망시키고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적류(嫡流) 자리를 확립한지 불과 3년 남짓한 때였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그가 죽은 것은 12월 29일이라 여겨지며, 쿄(京)를 탈출한지 3일째에 해당한다. 요시토모도 요리나가나 신제이와 마찬가지로 기나긴 공포와 고통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그와 마사이에의 목이 고쿠몬(獄門)에 내걸린 것은 해가 바뀐 정월 9일의 일이다.
이 오사다 타다무네는 타이라노마사카도(平将門)의 숙부인 요시카네(良兼)의 혈통에 속한다. 10세기말부터 11세기 초, 요시카네의 손자인 무네요리(致頼)와 자식인 무네츠네(致経)가 이세(伊勢)의 영지를 둘러싸고 사다모리(貞盛)의 아들인 코레히라(維衡)들과 항쟁하다 패배, 지방 무사로 전락해버렸다. 어쩌면 이세의 거점을 잃고 오와리로 도피했을 것이다. 카와치 겐지와의 주종관계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카마타 마사이에의 사위였기 때문에, 쿄와 토고쿠를 오가는 요시토모에게 접근하여 낭도와도 인척관계를 맺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이자면, 장관을 맡고있던 우츠미노쇼(内海荘)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 건립한 안라쿠쥬인령(安楽寿院領)이었다.
『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타다무네는 상으로 이키노카미(壱岐守)에 보임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사료에는 그의 임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그후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없다.『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요리토모에게 항복하여 헤이시 토벌에서 활약하였으나, 최후는 극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황당무계하다.
한편,『吾妻鏡(아즈마카가미)』지쇼(治承) 4년(1180) 8월 9일 조(条)에, 요리토모의 동향을 밀고한 오사다 뉴도(長田入道)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스루가(駿河) 부근에서 활약한 유력 무사로, 이를 타다무네의 후신(後身)... 또는 그 일족이라 보는 설도 있다. 카마타의 본령(本領)이 스루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카마타 토벌 이후에 영지를 탈취했다고도 생각 할 수 있다. 결국, 10월 1일에 카이로부터 스루가를 침공한 카이 겐지(甲斐源氏)에게 자식 둘이 모두 전사하게 되는데, 요시토모 살해에 관한 기술이 없어, 이것이 타다무네와 관계가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장남인 요시히라의 운명은『헤이지모노가타리』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일단 지방 무사의 조직화를 추진했지만, 요시토모가 패사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무사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고, 어쩔 수 없이 홀로 쿄에서 잠복하며 키요모리 이하의 암살을 꾀했지만, 중병에 걸렸기 때문에 난바 츠네후사(難波経房)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로쿠죠(六条) 강변에서 츠네후사에게 참수되었는데, 나중에 요시히라의 원념(怨念)에 의해 츠네후사가 낙뢰로 죽어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생겨났다.
부친이나 형이 처형, 전사하는 운명을 맞이하던 중에, 요리토모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대로이다. 그는 당시 열세 살,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 초진(初陣)이었다. 사정은『헤이지모노가타리』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는데, 체포된 요리토모가 신심이 깊고 아직 어리다는 데에 마음이 움직인 이케젠니(池禅尼)가 그의 구명을 키요모리에게 탄원하여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사실일까?
이미 카도타 분에이(角田文衛) 씨가 밝혀놓았듯이, 그녀는 단순한 감상(感傷) 때문에 요리토모의 구명을 바랐던 게 아니다. 이케젠니는 원래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의 누이인 죠사이몬인(上西門院)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요리토모는 인노쵸(院庁)의 쿠로도(蔵人) 등으로서 이 뇨인(女院)을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 죠사이몬인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요리토모의 구명을 이케젠니에게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케젠니가 키요모리를 설득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그녀가 타다모리(忠盛)의 정실(正室)이었기에 타다모리가 죽은 뒤 집안에서 커다란 발언력을 유지하여 적자인 키요모리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데에 있었다. 또, 요리토모는 요시토모 일행과 떨어져 오와리노쿠니에서 이 지역의 즈료(受領)인 타이라노요리모리(平頼盛)의 낭도 타이라노무네키요(平宗清)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기하시 타카오(杉橋隆夫) 씨가 지적하고 있듯이 요리토모의 신병에 대하여 강한 관리권을 갖고 있었기에 모친인 이케젠니의 발언력을 강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그런 요리토모가 헤이시를 멸망으로 내몰게 되리라고는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요리토모의 동생들도 유배나 출가하는 운명을 맞이해, 카와치 겐지의 무장들은 모두 쿄에서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오랜기간에 걸쳐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와 대항하다 호겐의 난의 승리에 공헌한 뒤로 키요모리 다음 가는 세력을 자랑했던 카와치 겐지 이치몬은 괴멸하게 된다.
요시토모와 행동을 함께한 미츠마사류(満政流 = 満正流) 출신인 시게나리(重成)는, 미노 아오하카쥬쿠(青墓宿)에서 요시토모를 대신해 죽었다 여겨진다. 몬토쿠 겐지(文徳源氏) 출신인 스에자네(季実)도,『헤이지모노가타리』에 따르면 참수를 면하지 못 했다. 이리하여 노부요리와 함께 행동한 인의 측근들은 그야말로 전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