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장 -싸움의 종식
三. 최후의 승자
◇ 난(乱)의 종결
~ 이리하여 니죠 텐노(二条天皇)의 측근들의 중심인 츠네무네(経宗)와 코레카타(惟方)도 실각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의문은 남는다. 어째서 노부요리(信頼), 요시토모(義朝) 토벌의 입역자들이 이리도 간단하게 실각해버린걸까? 물론,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에 대한「불경한 행위」도 비판의 대상이었을테지만, 그다지 권위도 권력도 없던 고시라카와인이, 어째서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를 움직일 수 있었던걸까? 또,『愚管抄(구칸쇼)』가 추측한 키요모리의「생각한 바」는 어떤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찍이 야스다 모토히사(安田元久) 씨가 지적했듯이,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는 사건을 야기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 생각된다. 원래, 그들은 노부요리와 나란히 反신제이(信西)파의 중심이었으며, 산죠도노(三条殿)를 습격하여 신제이를 죽음으로 내몬 정변(政変)의 주모자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실각하는 것도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정국(政局) 밖에 있던 키요모리를 끌어들여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를 토벌하고 사태 수습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적에 의해 노부요리 멸망 이후의 정계에 군림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일련의 정치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의 일원이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야기에 한몫한 병란을 자신의 손으로 진압한 것으로, 이것은 그야말로「매치펌프(match pomp)」나 다름 없었다. 그런 츠네무네, 코레카타가 정무를 주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수많은 귀족들의 마음 속에 피어올랐으리라 생각된다.
두 사람의 체포를 실행에 옮긴 키요모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신제이와도 노부요리와도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 중립파라고 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물론 신제이 타도의 움직임에 일절 가담하지 않았으며, 신제이와 강하게 제휴한 움직임도 없었다. 당연히, 츠네무네와 코레카타의 전횡에 대해 냉담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키요모리와 마찬가지로, 니쵸 텐노의 측근과 키요모리를 결합시킨 나이다이진(内大臣)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나, 코레카타의 형인 미츠요리(光頼), 나리치카(成親)의 형인 타카스에(隆季) 등...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 이르는 정정(政情)의 혼미가 있었을 때에, 경거망동하지 않으려 한 유력자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앞에서도 다뤘던대로, 노부요리의 실각으로 궁지에 몰린 셋칸케(摂関家)의 큰어른인 타다미치(忠通)도 츠네무네 실각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마음이 들떠있던 츠네무네, 코레카타가 너무나도 강제적인 행동을 취해 고시라카와인의 불만을 초래한 것이다. 확실히 고시라카와인의 권위는 모자라고, 고시라카와인의 인정(院政)을 지지하는 세력도 약체이긴 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인에 대한 도를 넘은 억압은, 타다미치와 키요모리를 시작으로 하는 반대파들에게 츠네무네와 코레카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계기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구칸쇼』에서 보이는 키요모리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광범위한 반대파의 존재가, 츠네무네와 코레카타의 실각을 가능케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츠네무네와 코레카타가 실각했을 때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게 있다. 즉, 그들이 추포된 2월 20일로부터 2일후, 신제이의 자식들이 겨우 사면되어 귀경(帰京)을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부요리가 처형당했을 때에도 결코 용서받지 못 했다. 그야말로 츠네무네, 코레카타의 유배와 맞물려, 신제이의 자식들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이다.
이것은 노부요리가 죽은 뒤에 정무를 주도하고 있던 츠네무네와 코레카타 두 사람이, 신제이나 그 자식들을 일관되게 죄인으로 몰아 처벌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실각에 의해, 처음으로 신제이와 그의 자식들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귀경을 허락받게 된다. 츠네무네, 코레카타는 노부요리와 공모하여 신제이 타도를 위해 정변을 야기했다. 이후, 그들에 대한 반발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 생각된다.
헤이지의 난에서는, 정국이 심하게 변전(変転)하고 있다. 정치의 주도권은 신제이로부터 노부요리에게, 그리고 츠네무네, 코레카타에게로... 문자 그대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옮겨져 갔다. 그 모든 자들이, 죽거나 실각하여 정계로부터 모습이 사라져갔다. 신제이 타도를 목적으로 막을 연 헤이지의 난은, 츠네무네와 코레카타의 실각에 의해 최종적인 종식을 맞이했다.
2월 28일, 츠네무네와 코레카타는 해관(解官)되었다. 3월 11일, 츠네무네는 아와(阿波)로, 코레카타는 나가토(長門)로 각각 유배되었다. 코레카타는 유배를 갈 때에 출가했다고 한다. 토바인(鳥羽院)으로부터 장래를 보장받았던 수재는 서른여섯 살에 정계로부터 사라져갔다. 덧붙여,『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에서는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진 것을, 元칸파쿠(関白)인 타다미치가 구명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무인(武人)으로서 병란을 야기한 노부요리와는 달라서, 사형이 예정되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